[진료실 풍경] 당신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입력 2021-04-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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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전문의

나는 의원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미용실을 다닌다. 하고 싶은 머리 모양이 있을 때도, 딱히 없을 때도 언제나 그 미용실을 간다. 한번은 머리를 기르던 중이었는데 미용실을 찾았다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고 내몰린 적이 있다. “기르고 싶다면 여기 근처에 오지 말라”고도 했다. 그 미용실 원장님은 일종의 내 머리카락 주치인 셈이다.

언젠가 미용실 의자에 앉아 그녀가 나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기분 좋은 느낌에 흠뻑 취하고 있을 때, 그녀는 시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오랜 와상의 시간을 보내시던 그녀의 시어머니가 “나도 너처럼 파마도 하고 염색도 하고 싶은데 머리 모양이 말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는 거다. 오랫동안 누워만 지내다 보니 머리카락이 빠지고 부스스해져 볼품없다고 한탄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녀는 시어머니가 기운을 차리시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두세 시간만 앉아 계실 수 있으면 집으로 파마와 염색 도구를 모두 가져와 머리를 해드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어차피 누워서는 염색, 파마를 하기가 힘드니까.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약속을 믿고 조금씩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 몇 분만 앉아 있으려 해도 척추기립근이 약해 버티지를 못하시더니, 점차 앉아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져 몇 달 후에는 세 시간을 꼿꼿이 허리를 펴고 버티실 수 있게 되었다. 바르게 앉는 자세는 재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시어머니는 바라시던 파마와 염색을 하셨고, 그 후의 삶도 달라지셨음은 물론이다.

‘립스틱 사인’이라는 말이 있다. 립스틱 사인은 병원에 입원 중인 여자 환자들이 몸이 나아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인이라고 일컬어진다. 몸이 너무 아플 때는 자기 몸을 돌볼 여유조차 없던 여자 환자들이 입원 치료로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스스로 몸을 관리하고 치장도 하기 시작한다고. 립스틱까지 바르기 시작하면 이제 퇴원할 때쯤이 다 된 거라는 일종의 사인이다.

립스틱 사인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기분이 나빴다. 성차별적이라고 느꼈다. ‘립스틱’ 사인이라니! 아니, 여자들은 몸이 아플 때에도 립스틱을 바르고 치장을 해야 한단 말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에도 자신의 단장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인가. 대체 여자들은 왜 환자일 때조차 여성성을 지키기를 강요받는 것일까. 또 왜 여자들 스스로도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녀의 시어머니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른 관점도 가지게 되었다. 사화적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관리의 힘이 한편으론 소중한 재활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립스틱만이 아닌 다양한 사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게 아닐까. 재활의 동력은 다양할수록 좋으니까.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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