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법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

입력 2021-04-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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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산 금융부 기자

금융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노조추천이사제는 여태 성과가 없다. 민간 금융사는 주주총회에서 막혔고, 국책은행은 상임 기관장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노동자 대표를 이사직에 앉히는 노동이사제도 아니고 그보다 단계를 낮춘 노조가 추천한 인사를 임명하는 것임에도 실패했다. 공공기관에서 시작해 민간 기업에도 전파한다는 애초의 시도는 첫 단추조차 채우지 못한 것이다.

이제 이 제도는 ‘법’에 기대는 것이 유일한 길이 돼버렸다. “제도가 필요하다”는 은행장의 말은 사실 “관련법이 없다”는 말과 같다. 주주총회도, 상임 기관장도 반대할 수 없도록 법률적인 근거를 마련해야만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경영에 과도한 개입이라는 등의 반대 논리도 원천 차단된다. 실제로 금융노조도 집권 여당을 압박해 노동이사제의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꼭 법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될까. 제도가 법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필요한 것임에도 미처 마련하지 못한 것도 되지만, 자율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라서 굳이 법률로 적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후자의 경우는 제도가 생김으로써 자율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령 노사 간 자율합의에 이르지 못해 마련된 최저임금제도가 그렇다. 노사는 매번 이상적인 합의를 꿈꾸지만 둘 다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만다.

만약 노조추천이사제로 이사가 임명됐음에도 그의 역할에 한계가 생기고, 실제로 예견했던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그 회사는 후에 사외이사를 바꾸면 된다. 이것이 제도가 법률로 굳어지기 전에 할 수 있는 자율적 합의의 이상적인 결과다. 하지만 지금의 금융권은 애초에 시범 운영의 기회도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 논리에 따라 노조가 추천한 인사를 퇴출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 됐다.

무엇이든 법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보수적인 태도가 금융권 내에서 주도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아쉽다. 아직 금융은 해야만 하는 일이 많은데, 과연 그들이 수많은 과제를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법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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