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 노환에 따른 대동맥 출혈로 입원한 정 추기경은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마지막을 준비해 왔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28일 선종 미사를 봉헌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고인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생전 장기 기증을 약속한 고인은 안구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재산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인 명동밥집과 아동 신앙 교육 등에 기부하기로 했다.
정 추기경은 1931년 4대째 내려오는 서울의 오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발명가를 꿈꾸던 그는 중앙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6ㆍ25 전쟁 중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다.
고인은 196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중림동 성당 보좌신부와 성신고 교사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 유학, 1970년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는다. 그 해 정 추기경은 만 39살에 천주교 청주교구장으로 임명, 주교에 서품된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어린 주교였다. 청주교구장을 지내면서 오웅진 신부를 도와 충북 음성군에 복지시설 꽃동네를 설립했다.
정 추기경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 후임으로 제12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돼 2012년까지 재임했다. 교구장 재임 중인 2006년엔 김수환 추기경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 사목하며 배아 복제 줄기세포 연구 반대, 사형제 폐지 등 생명 운동에 주력했다. 다만 진보적 사제 단체인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전종훈 신부를 본당 사목에서 배제하는 등 보수적으로 교구를 운영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 추기경은 학자로도 이름 높다. 1961년부터 매년 한 권 이상 책을 내 저서 45권과 역서 13권을 남겼다. 전공인 교회법 분야에선 각각 6년, 14년을 들여 저술한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공역), 교회법 해설서(15권)를 남겼다.
염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아버지였다면 정진석 추기경님은 어머니와 같이 따뜻하고 배려심 많고 우리들을 품어주시고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치 않는 분이셨다"고 고인을 떠올렸다.
정 추기경 장례는 다음 달 1일까지 오일장으로 치러진다. 조문은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에 따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받는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