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다희는 뮤지컬 '아이위시' 무대에 오를 때마다 데뷔 9년 차를 맞은 자신을 마주한다. 지금 정다희가 서 있는 무대 그리고 현실은 영화 '헤드윅'과 '시카고'를 보며 꿈을 키울 때 올려봤던 무대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오디션이 두려워 도망쳤던 순간도 있다. 그는 "너무 내 얘기 같아서 현타 오는 작품"이라고 '아이위시'를 소개했다.
현실을 직시하는 건 배우 강찬도 마찬가지다. 강찬은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매 순간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뮤지컬 '아이위시'는 2018년 영국에서 초연한 뮤지컬 '내 삶이 뮤지컬 같았으면 좋겠다'(I Wish My Life Were Like a Musical)를 배우 이석준이 가져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무대 뒤 배우들의 실제 삶과 공연계 뒷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풀어낸다.
'아이위시'는 거대한 서사를 가지고 풀어나가는 여타의 뮤지컬과 달리 넘버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넘버 제목부터 '아이위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준다. '오직 공연을 위해 살지', '내 인생이 뮤지컬 같다면', '정극 배우', '커버', '노래를 사랑해', '늘 새로워, 관크는 언제나 짜릿해!', '디바' 등이 공연을 채운다.
정다희는 "대본에 제 역할이 어떤 캐릭터인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다"며 "다른 공연은 캐릭터의 서사를 잘 담아 인물을 구축해야 했다면, '아이위시'는 제가 잘 스며들어야 설득이 되는 작품"이라고 했다.
강찬과 정다희는 상반된 성격을 가진 배우들이다. 두 사람의 교집합은 2012년에 데뷔한 것과 동국대학교 연극학부 동문이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성격도, 데뷔 과정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지만, 배우라는 직업의 고충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아가 무대, 함께하는 이들의 소중함 등을 '아이위시'로 알아가는 건 같았다.
정다희는 시나리오에 자신의 역할이 '여자 2'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없어 당황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남자 1'인 강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무대 위에 오른다는 두 사람이었다.
강찬은 정다희가 '노래를 사랑해' 넘버를 소화할 때 보이는 행동들이 전부 '준비된' 애드리브라고 폭로했다. 정다희는 상황에 잘 맞지 않는 애드리브는 그저 실수로 보일 거라는 생각에 대기실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의견을 묻고 또 물었다.
"오늘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선 명확하게 계획을 세워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재미없거나 흐지부지돼버려요. 완성도 있는 무대를 보여드리려면 노래 안에 들어가는 템포, 타이밍이 중요해요.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재미없고, 실패하면 그냥 실수예요. 그래서 찬이랑 영수 오빠를 귀찮게 하네요. 사실 사람 골라가면서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웃음)
강찬은 자타 공인 댄스왕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해명했다. "저 놀리려고 형들이 한 말이에요. 그래도 상처받지 않아요. 어떤 기대가 있어야 상처를 받는데, 크게 잘 추고 싶단 생각도 없어서 그냥 즐거워요. 근데 하다 보니 좀 늘었어요. 이현정 감독님이 안무 맡으셨는데, 저 잘 춘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대요. 감독님도 신나셨어요. 자신감이 요새 조금 생겼어요. 어디 갔는데 댄스 있다? '아 예~ 하겠습니다' 해요. 하하." (웃음)
- 배우가 처한 현실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다희 "의도한 건진 모르겠는데 공연 넘버 진행이 신기하게도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순서대로 나열한 듯해요. 오프닝이 화려하거든요. 오디션을 보기 전 저희의 시작점을 보여주는 거죠. 중간쯤 공연이 진행되면 '커버'와 '정극 배우'라는 넘버가 나와요. 주목받지 못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넘버들이에요. 그때부터 저는 우울해져요. 특히 '커버'는 저를 공연하기 싫게 만들어요. 너무 제 얘기 같아서 할 때마다 현타가 와요. 그러다 마지막 노래를 부르면서 저는 다짐해요. 이렇게 와주신 관객을 생각하면 나는 할 수밖에 없다고요."
- 힘이 들 때도 있을 것 같다.
정다희 "'현실적인 문제'라는 내레이션이 있어요. 저는 매 공연마다 거울 보듯 저를 마주해요. 공연 자체가 힘들어요. 뮤지컬 '렌트' 원 캐스트로 무대에 설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어요."
- 관객석에 빛이 들어올 때가 많다. 관객과 소통도 필요한 작품이다.
정다희 "공연할 때마다 있는 얼굴이 있어요. 볼 때마다 잔소리해요. 돈 아껴서 옷 사 입으라고요. 그렇게 해도 자주 와줘요.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공연 보러 와주신 이들의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은 공연을 하고 싶어요."
강찬 "책임감을 느끼고 작품에 임하고 있어요. 특히 이 작품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있다 보니 제가 제 몫을 정확하게 해내지 않으면 다음 곡까지 영향이 갈 수도 있어요. 또 10곡 넘게 솔로곡으로 진행돼요. 중간에 어떤 신이 있거나 드라마가 있는 게 아니어서 집중해야 하죠."
정다희 "날것 그 자체예요. 뚜껑을 열기 전까지 정말 고민이 많이 됐죠."
- 걱정을 안고 무대 위에 올린 결과물은 어떠했나.
정다희 "초반엔 공연 시작도 안 했는데, 관객 수를 보고 무너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관객이 이 정도로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공연의 힘'도 느끼고 있고요. 초반보다 더 많이 와주고 계세요."
강찬 "작품 특성상 객석에 직접 하는 콘택트가 많아요. 그 영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품이면 객석 영향을 많이 안 받는데, 저흰 어쩔 수 없이 매번 객석 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코로나 영향까지 받아서 더 속상해요."
- 처음 작품에 참여 결정을 했을 때와 작품을 하면서 '배우'라는 직업, '배우의 삶'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지점들이 있는지.
정다희 "눈물 나게 고마운 지점들도 있어요. 지금도 오디션을 보지만, 한동안 첫 오디션 때 '끓는 마음'을 잊고 지냈던 것 같아요. 대극장 오디션이 무서워서 보지 못한 적도 있어요. '보디가드'와 '렌트'가 5~6년 만에 본 오디션들이었죠. 왜 그 끓는 마음을 무시하고 살았을까요? 그래서 데뷔 9년이 지난 지금 이 모양일까요?"
강찬 "그래도 제가 평소에 공연으로만 봤던 형, 누나들과 함께 작품을 하고 있어서 즐거워요. 현선 누나, 영수형, 은석이 형 모두 제가 작품을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설레는 사람들이에요. 배우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형, 누나들의 스토리도 들었어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배우들도 힘든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끈끈한 동료애가 생겼어요. 신뢰가 없으면 버티기 힘들 수 있는 작품인데, 회를 거듭할수록 저희 시너지는 더 좋아지고 있죠."
- 앙상블 관련 넘버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나.
정다희 "역할이 있는 거였지만 '셜록'에선 거의 앙상블이었죠. 3년간 했어요. 지방까지 다 돌았죠. '커버' 노래가 그때를 떠오르게 해요. 저 '렌트' 때는 광고판에 0.2초 나왔어요. 그거 말고는 한 번도 광고판에 나온 적이 없었거든요. 광화문 한복판에서 그 광고판 보고 엄청 울었어요. 9년 만에 2초라, 쉽지 않은 길이에요."
강찬 "'커버'는 배우뿐만 아니라 살면서도 공감될 수 있는 부분을 담고 있어요. 때로는 제가 주목받는 메인이 아니라 항상 기회를 기다려야 하는, 2인자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정다희 "배우들이랑 연습실에서 커버' 연습할 때 다 같이 운 적이 있어요. 박영수 오빠가 갑자기 막판에 울기 시작하면서 모두 뚝뚝 눈물을 떨군 거죠. 모두가 겪은 이야기니까요. 한 번도 안 겪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 찬이는 모를 거예요." (웃음)
- 데뷔 때 기억나는지.
강찬 "뮤지컬 '화랑'에 대타로 들어갔어요. 원래 공연하기로 했던 배우가 하차하면서 대학교 1학년 다니다가 급하게 들어간 거죠. 그래서 학교는 못 가게 됐어요. 배우를 꿈꿨고, 힘들게 학교 간 거라서 데뷔를 빨리할 수 있는 게 좋아서 무슨 작품인지도 모르고 들어간 거예요. 그러다 첫 공연 직전에 덜컥 겁이 난 거죠. 제가 하는 공연을 돈주고 보다니요. 책임감과 부담감이 엄청 느껴졌어요. 커버 가수는 아니었는데, 비슷하게 됐네요. 우연한 기회에 작품을 하게 됐으니까요."
- 평소 루틴이 어떻게 되나.
정다희 "정말 많아요. 무릎이 안 좋아서 4시간 전엔 공연장에 가서 1시간 운동을 한 뒤 분장을 받아야 해요. 또 공연하는 날 아침엔 무조건 뜨거운 물로 샤워해요. 증기로 근육을 이완시키죠. 공연 전엔 반드시 밥을 먹어요. 빈속으로 공연하면 질이 달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공연이 아예 안 돼요. 힘이 반 밖에 안 나와요."
강찬 "예전에 다이어트한다고 저녁을 거른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앙코르곡에서 힘이 아예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 전엔 이제 어느 정도 배부르게 먹고 올라가요. 양치도 꼭 하고, 꼭 목과 몸을 풀고요. 많은 배우들이 기본적으로 하는 루틴일 거예요."
정다희 "화장실도 가야 해요. 화장실 안 가고 무대 위에 올랐다가 얼마 전 공연 중간에 치명적인 실수를 했지 뭐예요. 시스루 옷 입고 춤추고 앉아있는 명상의 시간 때 관객들한테 죄송하다고 하고 화장실 다녀왔어요. '아이위시'여서 가능했던 일이었죠."
- 오디션 경험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강찬 "드라마 오디션이 들어왔는데 저와 정말 안 어울리는 까칠한 역할이었어요. 이미지가 잘 어울린단 피드백을 받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전날부터 시니컬한 상태를 유지했고, 들어가서도 시크하게 대답했어요. 원래 웃는 스타일인데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랬겠어요. 이후에 당시 매니저 형이 들어가서 어떻게 했냐고 묻더라고요. 심사위원 분위기가 안 좋았대요. 원래 그런 이미지가 아닌데, 싹수 없는 사람이 된 거예요. 괜히 메서드 한답시고." (웃음)
- '아이위시'에서 보이는 모습 중 어떤 매력이 관객에게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강찬 "잘 아는 배우인데도 무대를 보면 되게 멋있어 보일 때가 있어요. 잘 포장된 모습을 보는 거죠. 저희 공연은 그런 배우들의 그렇지 못한 면을 보여줘요. 그런 면 때문에 희열과 재미를 느끼시는 거 같아요. '저 배우가 저런 면이 있어?' '배우도 우리랑 다르지 않구나' 하는 거죠. 그래서 저희도 더 솔직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려고 하죠."
-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정다희 "최근 많은 뉴스를 보면,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화두가 이슈가 되더라고요. 지금은 많은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금전적으로, 영향력으로 도와줄 수 없는 걸 깨닫게 됐어요. 연기 잘해서 영향력을 얻고, 그걸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강찬 "사람들이 어떤 배우를 보고, 공연을 보는 이유는 행복해지고 싶어서라고 생각해요. 저는 멀리 돌아와 시작해서 그런지, 제가 선택한 걸 책임지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저 스스로 줬어요. 요즘은 제가 무대 위에서 행복할 때까지 하잔 생각을 해요.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을 때까지 하자는 생각을 하니 정말 행복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