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강제노역에 대한 일본 기업의 위자료 배상 책임을 인정한 지 2년7개월여 만에 1심 법원이 다른 판단을 내놨다. 이번 강제징용 사건은 같은 취지의 다른 소송을 통해 13년간 재상고심 등 전원합의체를 포함한 5차례의 재판을 거쳐 세운 판례를 하급심에서 뒤집은 만큼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 부장판사)는 각하 판결에 따른 반발을 예상한 듯 애초 10일로 예정했던 선고기일을 7일로 갑자기 당겨 선고했다. 재판부는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은 만큼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1심 판결에 따른 소란을 피하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 대표는 "선고기일이 오늘로 변경된 것을 당일에 알고 깜짝 놀랐다"며 "원고 대부분이 지방에 사는데 사전 연락과 통보도 없이 이렇게 한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부가 각하 결정을 내리면 원고 반발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고의적으로 기일을 당긴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일본 기업 16곳을 대상으로 한 이번 사건에서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는지, 행사가 제한됐는지 등이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헌법과 국가,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2005년 공개된 청구권협정 2조에는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의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했다. 또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구도 들어갔다.
이에 대한 해석은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전합에서도 일부 갈렸다. 앞서 전합은 2018년 10월 대법관 다수 의견으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정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과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다.
다만 재판관 3명은 별개의견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봤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봤다.
1심 재판부가 이날 각하 결정을 한 것은 전합에서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대법관 2명의 반대의견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 문구를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특히 재판부는 “비엔나협약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며 “각국이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언동 등은 적어도 국제법상 ‘묵인’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에 배치되는 발언, 행위는 국제법상 금반언의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비엔나협약 27조,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신의칙을 위반함으로써 판결의 집행 자체가 권리남용에 해당해 청구이의 소송 등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또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지면 국제적으로 초래될 역효과 등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강제집행은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되지 않고 결국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구할 수 없는 권리”라고 판단했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전합에서 청구권협정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한 판단을 내린 사건”이라며 “항소심, 상고심에서 판례대로 뒤집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외교적으로 이번 판결은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동력을 부여하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 전망이다.
일본은 한일관계 복원을 원하는 우리 정부를 향해 “한국 측이 해법을 찾아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왔다. 정부는 이날 판결이 나오자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일본과 해결방안을 협의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며 “정부로서는 앞으로도 사법 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를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방안을 논의하겠다”며 “정부는 열린 입장으로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관건은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문제에 대해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그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그런 단계가 되기 전에 양국 간의 외교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인데, 다만 그 외교적 해법은 원고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원고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양국 정부가 협의하고 또 한국 정부가 그 방안을 가지고 원고들을 최대한 설득해내고,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