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쉬 총리 소유의 아그로페르트(Agrofert)는 농산물부터 재생에너지, 미디어까지를 망라하며 3만 명이 넘는 근로자를 고용한 대기업이다. 2018년 유럽연합(EU)으로부터 350만 유로(약 47억 원)를 지원받아 수도 프라하 교외에 국제회의 센터를 건축 중이었다. 이 건축 자금 유용 혐의가 있어 체코 경찰이 2017년부터 이 사건을 수사해왔다. 경찰은 지난달 재차 수사를 권고했다. 이미 2년 전 검찰이 경찰의 수사 권고를 거부하고 무혐의 처분했었다. 바비쉬 총리가 정책을 결정하고 EU기금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권력기관의 장에 측근을 임명했으니 수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처럼 EU 예산 지원을 받은 여러 회원국에서 예산의 유용과 부정 지출이 끊임없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1일 유럽검찰청((European Public Prosecutor’s Office: EPPO)이 정식으로 업무를 개시하면서 EU 예산 부정 사용에 대한 전면전이 시작됐다.
농민 지원과 낙후지역 지원 주목적
올해 EU 예산은 약 1661억 유로, 우리 돈으로 225조 원 정도이다. EU 27개 회원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1% 정도이다. 회원국 경제력에 비례하는 분담금이 전체 예산 수입의 75%, 나머지는 EU의 공동정책 실시로 나오는 수입이다. 비회원국 상품이 EU로 수입될 때 EU는 회원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일 관세를 부과한다. 이게 곧바로 EU 예산으로 들어간다. 독일이 EU의 최대 경제대국으로 EU 예산의 20% 정도를 부담한다.
문제는 이 예산의 쓰임새이다. 개별 회원국이 아니라 EU 차원에서 회원국 농민들을 지원해주는 공동농업정책에 전체 예산의 3분의 1 정도가 쓰인다. 나머지 3분의 1은 낙후지역에 지원해준다(지역정책 혹은 결속정책). 2004년 EU에 가입한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등과 같은 중동부 유럽의 경우 낙후지역이 꽤 많고 농업 비중이 서유럽에 비해 높은 편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EU 예산 납부액보다 지원받는 금액이 훨씬 많은 전형적인 순혜택국이다.
농민 지원에 예산의 3분의 1을 쓰지만 EU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하다. 전체 고용에서 농업의 비중은 4.4%, GDP는 1.2%에 불과하다. 그런데 EU 예산의 3분의 1이 그곳에 지출된다.
농산물 과잉, 공동농업정책 도마위
지금은 회원국이 아니지만 과거 영국이 EU 회원국이었을 때 영국 언론의 단골 메뉴가 공동농업정책 비판이었다. ‘산처럼 쌓인 버터’, ‘호수처럼 철철 넘치는 포도주’, 회원국 농민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거의 다 지원해 주었기에 과잉 생산이 문제였다. 보관 비용도 해마다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EU는 점차 농산물 품목에 따라 지원 최고한도를 정하고, 농산물 지원 비중도 줄이면서 직접 지원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반까지 당시 유럽경제공동체 예산의 70%가 넘던 농민 지원이 점차 줄어 현재 3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아직까지 20%의 부농이 전체 지원액의 80%를 받아 간다.
농민 지원 비중이 줄어드는 만큼 낙후 지역 지원 비중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유럽통합의 핵심 목표가 평화이다. 회원국 간의 경제·사회적 격차는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EU는 지역 격차 해소에 역점을 둬왔다.
농민과 지역정책 모두 EU 차원에서 결정되고 회원국이 예산을 집행한다. 회원국들이 예산을 집행하기에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관여하면서 그만큼 예산이 샐 구멍이 곳곳에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EU 예산의 최대 5% 정도가 부정 지출되고 있다고 추정하곤 한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의 예산 부정 지출을 적발할 경우 회원국에 조치를 요구한다. 하지만 회원국은 예산 환수를 꺼려왔다. 부정 사용한 액수만큼 회원국이 변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머리에 예를 든 바비쉬 총리는 역시 재테크의 귀재이다. 그가 운영하는 영농법인이 지난해 3000만 유로의 지원을 받았다.
수사·기소 가능한 유럽검찰청
이달 초 발족한 유럽검찰청은 EU 예산 부정 사용자를 적발해 기소하는 게 주요 임무이다. 룩셈부르크에 소재하며 각 회원국에서 파견된 검사들이 근무한다. 초대 청장은 루마니아의 로라 코드루타 코베시이다. 그는 2013년부터 5년간 루마니아 반부패청장을 지내며 검은돈 수사를 지휘해왔다. 집권당 유력 정치인도 잇따라 기소하면서 2018년 해임된 경력도 있다.
하지만 유럽검찰청은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다. 27개 회원국 가운데 정작 예산 유용 혐의가 큰 일부 회원국이 참여하지 않았다. EU 예산으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받는 헝가리와 폴란드는 유럽검찰청의 수사를 원하지 않았기에 불참했다. 헝가리의 경우 2017년 EU 예산 지원액이 GDP의 3.4%인 40억 유로 정도이다. 반면에 헝가리는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 인식 조사에서 27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를 차지했다. 아일랜드와 스웨덴, 덴마크는 검찰청과 회원국 간의 관할권 논쟁이 해결되지 않아 참여를 보류했다. 다음 달부터 6개월 간 EU의 순회 의장국인 슬로베니아는 유럽검찰청에 참여하지만 아직 파견 검사를 보내지 않았다. 불참 국가의 경우 참여한 국가와 EU 예산을 공동으로 지출할 경우 검찰청이 수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EU 공동 연구의 경우 최소 3개 회원국 이상의 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EPPO에 불참한 헝가리와 폴란드 학자들이, 참여한 독일 학자들과 EU 예산의 지원을 받아 공동연구를 수행하다가 예산 부정 혐의가 있으면 검찰청이 수사할 수 있다.
1000조원 유럽회생기금 용처 감시
EU는 지난해 7월 7500억 유로(약 1014조 원)의 유럽경제회생기금에 합의했다. 이 기금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은 회원국에 지원된다. 다음 달부터 회생기금이 지원되는데 최대 수혜국 이탈리아의 경우 2000억 유로의 지원을 받는다. 회원국들이 지원받은 막대한 돈을 자기 돈처럼 제대로 목적에 맞게 지출하는지 감시해야 할 일이 많다. 그만큼 새로 출범한 유럽검찰청의 임무가 막중하다. 22개 회원국이 각각 한 명의 검사를 유럽검찰청에 파견했다. 회원국에는 이들과 공조해 수사하고 기소하는 2명의 검사가 배정되어 있다.
수사와 기소는 국가의 고유한 주권이다. 그런데 유럽통합이 계속해서 진전되면서 이 분야에서조차 EU 차원의 기구가 권한을 행사한다. 비록 EU 예산의 부정 사용에 국한되지만. 유럽검찰청의 역량 발휘가 기대된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