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간 사회과학 이론은 노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물적·심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점진적이고 정상적인 발달과정상의 퇴행적 변화로 설명해 왔다. 노화는 질병과 같은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누구라도 겪게 되는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발달과정임과 동시에, 개인이 대응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개별화의 여지도 강조한다. 특히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실천적으로 다루는 노인복지나 노년학은 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와 개인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데 초점을 둔다. 성공적 노화 혹은 활기찬 노화, 생산적 노화 등의 개념이 강조되는 맥락이다.
그런데 최근 노화에 대한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과학적 패러다임 전환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책 ‘노화의 종말’에서 노화와 장수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A. 싱클레어 교수는 노화는 질병이라고 단언한다. 노화는 신체 능력을 쇠퇴시키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며 특정한 병리 증상을 지니는 등 우리가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모든 범주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질병이라는 것이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길이 아니며, 치료될 수 있고 치료되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제 인류가 노화라는 질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과학적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실제로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11번째 ‘국제질병분류’에 노화를 포함시켰다.
이처럼 노화가 질병이라고 미리 공식 선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적으로는 노화를 고쳐야 할 질병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노화를 치료하기 위한 연구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질병에 대한 보험 적용 등의 산업적 인프라 구축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래서 질병과 장애 없는 건강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과학이 사회를 적극적으로 설득 중인 것이다. 실제로 노화의 원인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하여 어떻게 노화를 늦출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면서, 대규모 자금이 투자되기 시작하고 노화 치료 관련 스타트업 기업들도 등장하고 있다.
그동안 노화가 치료될 수 없다고 믿는 패러다임하에서, 사회과학은 노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길을 만들고자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그러나 노화가 치료되고 획기적으로 수명이 연장될 수 있는 과학적 진보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제 제기와 논의가 필요해졌다. 노화를 인위적으로 늦추고, 멈추고, 되돌리는 것, 인류의 수명 연장이 과연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부유한 사람만이 노화를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적 혜택을 누리게 될 경우 불평등의 문제가 생명과 건강 문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면 고령화 비용 문제는 심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충분한 심리사회적 성장과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채 생물학적으로 혁신적인 노화 치료와 생명연장이 이루어진다면 개인에게나 인류에게 과연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생애기간에 걸친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이론을 구축한 에릭 에릭슨은 65세 이후의 노년기를 생애의 마지막 여덟 번째 인생발달 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이 단계는 자아통합 대 절망감, 즉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잘 통합해 성장하거나 좌절감과 분노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아 절망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에릭슨 부부는 90세가 넘을 때까지 직접 길고 긴 노후를 경험한 뒤에 결국 인간발달이론을 8단계에서 9단계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스웨덴의 사회학자 라스 톤스탐이 제시한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의 개념을 받아들여 생애 마지막 단계에 포함시킨 것이다. 노년초월은 인간의 노화란 삶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시각을 성숙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노년기에 접어든 개인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전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제안이다. 실제로 초월을 경험하는 이들은 물질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에서 보다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상위관점의 시각으로 전환하게 되며 삶의 만족도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그리하여 에릭슨 부부는 노년초월을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다. “노년초월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 가장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대화할 수 있는 예술이고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생의 위대한 춤이다.”
노화를 치료해 내겠다는 과학의 야심찬 선언에 섣불리 들떠 부화뇌동하거나 무조건 태클 거는 것, 혹은 수수방관하는 자세 어떤 것도 그다지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작금의 고령화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과 합의, 그리고 길든 짧든 단 하루라도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삶과 내면을 성숙시키기 위한 깊은 성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