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군 생활을 하면서 한 선임에게 무시와 조롱의 상처를 받았었다. 상처는 점점 부풀어 올라 그에 대한 증오까지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피엑스 공중전화기 앞에 줄을 서 있었고, 내 앞에는 그 선임이 먼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선임의 수화기에서는 한 여성의 가냘픈 음성이 들렸다. 얼마 안 남은 전역까지 부디 몸조심하라는 걱정 어린 선임의 어머니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누군가에게서 듣게 되었다. 선임이 아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입대를 했다는 사실을. 내가 증오하는 그 인간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음을 인정하니 나의 증오도 조금은 가라앉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그 선임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다만 흐르는 시간 속에 묻어두었을 뿐. 나의 아버지는 고령이고 치매와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부쩍 야위어진 아버지를 볼 때면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의 소중한 아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현재,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 아버지가 더 애처롭게 보인다.
인간관계의 얽히고설킴,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갈등과 상처는 결국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을 관조하게 되면서 조금씩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상처를 주었던 그가 아무리 미운 인간이라고 해도, 그 역시 누군가로부터 태어났을 뿐이고 결국엔 죽게 되는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날의 상처를 조금은 더 성숙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고 마지막에 용서가 남는다. 상처를 준 그 사람은 나의 용서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용서는 상처받은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나만의 선택으로 남겨진다.
황정우 지역사회전환시설 우리마을 시설장·한국정신건강사회복지사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