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이라는 주제를 각각 내걸었다. 양 기관은 20일 언론공개회를 열어 "명품 중 명품을 공개한다"고 강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유족을 통해 기증받은 2만1600점 중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 77점(국보 12건·보물 16건)을 엄선해 공개한다.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 '인왕제색도', 삼국시대 금동불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일광삼존상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청동기부터 19세기 조선시대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명품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수집한 것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이 회장의 수집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청동기시대 토기로 산화철을 발라 붉은 광택이 아름다운 '붉은 간토기', 초기철기시대 청동기로 당시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방울’(국보 제255호), 삼국시대 배 모양을 추측할 수 있는 '배 모양 토기'와 뛰어난 금세공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쌍용무늬 칼 손잡이 장식'(보물 제776호), 조선백자로 넉넉한 기형과 문양이 조화로운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보물 제1390호)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는 이 회장이 강조한 문화 정체성을 국민이 가질 수 있게 호기심을 넘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며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민이 어떠한 시대와 분야의 유산을 좋아할지 몰라 성찬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받은 1488점 중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을 공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 메인으로 이중섭의 '황소',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을 꼽았다. 현대미술의 3대 화가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박미화 미술관 현대미술1과장은 "김환기는 단연 우리나라 작가 중 1위로 꼽히는데, 그의 이렇게 큰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며 "단순히 대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 작가만의 색깔이 담겨 있어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범의 '무릉도원'도 현대미술관이 꼽은 주요 작품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렇게 큰 박수근의 작품이 많이 없다"며 "우리 미술관에 빠져있던 작품들을 채워 넣게 돼 정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품 하나를 가지려면 몇 년 치 예산을 모아야 할 정도로 대작들"이라며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전시"라고 강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포스터까지 내건 작품은 '인왕제색도'다. 이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부부의 첫 수집품이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76세의 정선이 긴 장맛비가 갠 후의 인왕산의 모습을 가로 138cm, 세로 79.2cm의 커다란 화폭에 담은 이 작품은 전시장 정중앙에서 위엄을 뽐낸다. 먹의 농담을 살려 차례대로 쌓아가듯 그리는 적묵법(積墨法)으로 완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인왕제색도'는 기증품 중 독보적 가치를 지녔다"며 "76세의 노대가 정선이 눈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인왕산 구석구석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낸 최고의 역작"이라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해외에 있는 국보급 우리 문화유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다수의 고려불화가 국내로 돌아오는 데에는 이 회장의 역할이 컸다. 고려불화 특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가 전시에 나왔다. 고려불화는 국내에 약 20점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희귀한 문화재다.
700년의 세월을 맞은 만큼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는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빛 변색이 심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불화의 세부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터치스크린을 통해 엑스레이 촬영 사진을 공개한다. 영상으로 확대하면 천수관음보살의 눈과 손이 또렷하게 보인다. 중생을 구제하는 천수관음이 약 마흔 개의 손으로 각기 다른 지물을 잡고 있고, 그 사이 눈이 그려진 작은 손들이 촘촘하게 자리잡은 형상이다.
유수란 학예연구사는 "확대 사진을 보면 두 작품 모두 안료의 탈락이나 보수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며 "적외선 사진은 먹으로 그린 밑그림을, X선 사진은 채색 방식과 안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환기는 항아리를 사랑했다. 온 집안 그리고 마당까지 그가 수집한 항아리로 가득 채워졌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피난했던 김환기가 집에 돌아와 마주한 건 온통 깨진 항아리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 조각을 받침으로 쓸 정도로 김환기는 항아리를 아꼈다.
가로 281.5cm 세로 567cm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해 국내 최대 방직재벌 기업가가 된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해 제작한 작품이다. 파스텔톤의 색면 배경 위에 인간, 사물, 동물 등이 정면 혹은 정측면으로 배열됐다. 단순화된 나무, 항아리를 이거나 안은 반나의 여인들, 백자 항아리와 학, 쪼그리고 앉은 노점상과 꽃장수의 수레 등 김환기가 즐겨 사용했던 모티브들이다.
작품은 1956년 파리에 갔다가 돌아온 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의 발코니 도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과 투박한 색면 처리는 조선백자의 형식미를 흠모했던 이 시기 김환기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이 작품이 미술시장에 나와 이후 '이건희 컬렉션'으로 소장된 것으로 미술관은 추측했다.
이중섭의 대표작도 볼 수 있다. 강렬한 붉은 색을 배경으로 주름 가득한 황소 머리를 그린 '황소'와 고개를 푹 숙이고 매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흰 소의 전신을 담은 '흰 소'가 공개된다. 붉은 황소 머리를 그린 이중섭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은 총 4점뿐이다. 현존하는 이중섭의 '흰 소'도 5점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은 '황소'를 소장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박미화 과장은 "김환기의 전면점화와 이중섭의 '황소'를 들고 가서 '이러한 그림을 소장하려면 예산이 늘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도 된다"며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작품"이라고 했다.
'흰 소'는 2016년 덕수궁 전시 '이중섭: 백 년의 신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으나 자취를 감췄다. 특히 흰 소는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 중 하나다. 붉은 배경의 황소 머리를 클로즈업한 작품과는 달리 주로 전신을 드러내고 화면의 한쪽을 향해 흰 소가 걷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흰색'은 백의민족을, '소'는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동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어 조선인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암암리에 금기시됐던 소재인 만큼 해방과 전쟁을 거친 후, 이중섭은 흰 소를 적극적으로 재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