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합을 전공하며 주로 서유럽의 정치를 주목했었다. 당시 반년간 연구년을 얻어 크라쿠프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가르치며 폴란드의 유럽통합 정치를 현장에서 목도했다. 바로 도착 다음 날 그런 현장을 보다니!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국민투표에서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후 다음 타자로 종종 거론된 게 폴란드, 이탈리아였다. 당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청년들은 폴란드가 EU 가입으로 많은 경제적인 혜택을 얻었지만 EU의 간섭이 지나치다며 시정을 요구하려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류가 아닌 하나의 극단적인 시민운동이다. 그런데 최근 폴란드의 EU 탈퇴 의향이 법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폴란드 정부는 EU의 강력한 시정 요구를 거부하다가 일부 양보했지만 이는 전술적인 후퇴에 불과하다.
사법부 통제하는 집권여당 법과정의당(PiS)
지난달 14일 EU의 사법부인 유럽법원(사법재판소)은 폴란드의 판사징계위원회가 EU법을 위반했다며 이 위원회의 기능을 당장 멈추라고 판시했다. 폴란드 대법원 안에 설치된 이 징계위원회는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의회가 주도한다. 의회가 임명하는 사법위원회가 징계 위원을 뽑고 이들은 판결을 근거로 판사를 징계할 수 있다. 법무장관이 징계위원회를 장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과 괴리가 크다. 2017년부터 이 징계위원회가 업무를 개시했다. 2015년 10월 총선에서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 정당인 법과정의당이 과반을 얻어 집권했다. 2019년 총선에서 이 당은 다시 과반을 얻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유럽법원은 “징계위원회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평성 보장이 부족하다”며 EU법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정부의 구미에 맞지 않게 판결을 내린 판사를 징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U 조약이나 규정을 해석할 때 회원국 판사들은 유럽법원에 그 해석을 의뢰해야 한다(EU법이 회원국 법보다 우위에 있고 회원국 법원이 EU법 해석을 유럽법원에 요청한다. 세부 내용은 ‘유러피언 드림 7. 유럽통합 훼방꾼 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참조). 그런데 유럽법원은 이런 당연한 합법적인 절차를 시행한 폴란드 판사들이 징계에 회부됐다며 가치 공동체인 EU의 정신을 크게 거스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폴란드 헌법재판소(헌재)는 바로 그날 오후 유럽법원의 판시에 따라 판사 징계위원회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폴란드가 법에서 EU 탈퇴로 가는 결정적 조치”
폴란드 헌재의 판결에 대해 EU법 전문가들의 분석은 간단명료하다. 호주 시드니 대학교에서 EU법을 가르치는 보이체치 사두스키(Wojciech Sadurski) 교수는 이 결정을 “폴란드가 EU의 법에서 탈퇴로 가는 결정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글 첫머리에 나온 일부 소수 청년들의 요구와 정부의 공식 정책은 아주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며 회원국의 EU법 준수를 감독하는 집행위원회는 “EU법은 회원국 법보다 우위에 있다. 폴란드가 유럽법원의 모든 결정을 준수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에 지비그뉴 비오브로 폴란드 법무장관은 이 판결에 대해 “헌법과 상식이 승리했다. EU 기구의 간섭을 막아냈다”고 환영했다. 폴란드 사법부의 반발도 크다. 지난달 말, 약 3500여 명의 판사와 검사들이 정부에 판사징계위원회 중지와 EU법 준수를 요구하는 서명서를 제출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폴란드 정부에 대해 법 위반 절차에 돌입했다. 이달 16일까지 폴란드에 유럽법원의 판결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EU법에 따라 매일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공식 서한을 보냈다. EU가 거세게 몰아부치자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법과정의당 당수는 7일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판사 징계위원회를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일단 정면 충돌을 피했지만 폴란드와 EU의 충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행위원회는 더 큰 차원에서 지난 몇 년간 폴란드에 대해 시도해왔던 법치주의 위반도 관철시키려 한다. 아직 더 큰 싸움이 남아 있다.
회원국의 거부권 행사로 법치주의 위반 제재 실행 어려워
EU의 법체계를 종합한 리스본조약(2009년 12월 발효)은 7조에서 EU 회원국들이 법치주의를 위반하면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삼권분립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소수인 차별 금지, 소수민족 존중 등과 같은 원칙을 위반할 경우를 말한다. 이 조항은 EU가 단순한 경제블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가치를 존중하는 가치 공동체임을 명시했다.
폴란드의 법과정의당은 2019년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사법부와 언론에 손을 댔다. 사법부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봉사한 사법부의 적폐를 청산한다는 게 사법부 개혁의 논리이다. 2017년 대법원 판사의 퇴직 연령을 72세에서 65세로 낮췄다. 국영 TV와 라디오 경영진을 정부가 임명하게 언론 관련법도 개정했다. 대법원 판사를 빨리 내보내야 정부의 지시를 잘 듣는 판사로 교체할 수 있다. 이 결정 역시 유럽법원은 EU법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헝가리도 판사 임명을 행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는 매우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집행위원회는 두 나라에 대해 이런 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며 법치주의 위반 예방 절차에 들어갔다. 경고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게 예방 절차인데 이게 통하지 않으면 징계 절차에 들어간다. 이 절차는 단순한 EU법 위반 절차보다 좀 더 효력이 막강하다.
2018년부터 집행위원회는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해 법치주의 위반 징계 절차를 개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모든 회원국이 동의해야 이게 가능한데, 폴란드와 헝가리 두 나라가 서로가 징계 대상이 될 때 거부권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경제회생기금·법치주의 카드 남아 있어
EU는 법치주의 위반을 관철시키려 경제회생기금(ERF) 지원과 법치주의 준수를 연계하는 전략을 사용하려 한다. 지난해 7월 EU 정상들은 7500억 유로(약 1000조 원 정도)의 ERF에 합의했다. 회원국들은 기후위기 대응과 디지털 전환에 최소 50% 정도를 배정한 계획을 제출하고 집행위원회의 검토 및 승인 후 지난달부터 ERF 집행에 들어갔다. 일단 집행위원회는 법치주의 위반을 이유로 폴란드와 헝가리의 ERF 승인을 보류했다.
지난해 7월 ERF 결정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강력한 요구로 회원국들의 법치주의 준수와 ERF 지원 연계가 합의되었다. 이 역시 만장일치가 필요했기에 시행을 헝가리 총선이 끝나는 2022년까지 보류하기로 합의됐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를 알기에 기금 지원이 잠시 보류될 뿐이라 여기며 EU의 시정 요구를 거부해 왔다.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유럽연합의 전선이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동유럽에 있다”고 진단했다.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등 냉전시기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은 2004년 5월 EU 회원국이 됐다. 이들 모두 EU 예산 납부액보다 지원액이 훨씬 더 많은 EU 예산 순혜택국이다. 폴란드의 경우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경제가 계속 성장해왔다. EU 가입에 따라 투자 환경의 개선으로 외국인 투자가 몰렸다. 이들은 EU의 혜택을 많이 받아 왔지만 회원국 자격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거부해왔다.
일단 폴란드는 EU의 압력으로 한 발 물러서는 모양세를 취했다. 그러나 EU와 폴란드·헝가리는 앞으로 처리할 문제가 많이 남았다. 양국 모두 미해결된 충돌에 대해 쉽사리 양보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가장 핵심적인 가치조차 실행하지 못하는 EU를 보는 외부의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다.
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