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은 현 정부가 상반기분을 집행하고, 나머지를 차기 정부로 넘기는 전례 없이 두 정부를 아우르는 성격을 갖는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내년 5월 9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특수한 사태가 없었다면 종례대로 2월 말에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것이다. 정권의 마지막 예산은 현 정부가 짜고 쓰는 일은 다음 정부가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예산의 공유’라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따라서 2022년도 예산은 현 정부의 여러 정책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정부가 그것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연속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이미 짜 놓은 첫해 예산을 확 바꾸기는 어려울지라도 그 콘텐츠를 세게 흔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 정부의 영향력이 상반기까지 미치기 때문에 두 정권의 협치가 없으면 예산의 타이밍과 집중력이 떨어질 공산이 크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이 1년 반 넘게 지구촌을 흔들고 있는 위기 상황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작년 중반부터 코로나19 전 상태로 경제가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일부 산업과 기업의 실적 호조로 인한 착시 현상, 예상외의 세수 증대와 자금 살포로 인한 것이지 국민이 실감하는 경제회복은 아니다. 경제환경은 여전히 냉엄하고 회복 기조는 푸석푸석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서 내년 예산(안)을 들여다보자. 정부는 600조 원을 넘는 예산안을 책정하면서 4대 투자 중점 방향을 밝혔다. 경제회복(글로벌 강국 도약), 포용적 회복과 지역균형발전(양극화 대응), 탄소중립·디지털 전환(경제구조 대전환), 국민보호·삶의 질 제고(강인한 나라)이다.
예산안의 분야별 재원 배분을 보면 보건·복지·고용 분야가 전년비 8.5% 늘어난 216조7000억 원으로 전체 예산의 35.5%를 차지해 사상 최고의 예산 비중을 기록했다. 일반·지방행정 분야는 무려 14.3% 늘어난 96조8000억 원, 교육 분야는 83조2000억 원으로 16.8%나 늘어났다. 이 상위 3대 예산 종목은 아무리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한다고 해도 정치적 포퓰리즘 냄새를 지우기 어렵다. 단년도에 쓰고 지나가는 소모성 예산이다.
국방 예산은 55조2000억 원으로 4.5% 증가했다. 전체 예산의 9.1%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내년도 일본의 방위비 예산에 버금가는 규모다. 예산안에서 20조 원대에는 연구개발(29.8조 원), SOC(27.5조 원), 농수산(23.4조 원), 공공질서·안전(22.4조 원) 분야가 포진한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는 전년비 6.0% 늘어난 30조4000억 원으로 30조 원대에 진입했다. 다른 한편 주요 사업별 예산을 보면 양극화·사회안전망, 청년지원대책, 소상공인 위기지원, 출산·보육, 탄소중립, 백신·방역, 지역균형발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3층 예산구조(투자중점방향-분야별 재원배분-사업별 예산)는 예산 전문가들도 난수표처럼 난해하다고 한다. 예컨대 위기관리 예산인지, 경제재건 예산인지, 신복지 예산인지, 아니면 정부가 승부수로 내민 한국판 뉴딜 예산인지, ‘예산의 얼굴’이 안 보인다는 지적이다. 그 이유는 정치가 예산에 깊이 개입하고, 여기에 정권 말기에 관료들의 태만이 합쳐져 만들어낸 ‘망라형 예산 차림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책입안자(공급자)들이 만든 철저한 톱다운 예산이다. 정책수혜자(수요자)들의 긴급한 수요는 한가한 미사여구에 묻혀 버린 꼴이다.
내년에는 인플레가 되었든 디플레가 되었든 코로나 불황(리세션)이 올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코로나19 재난 속에서 사회안전망을 탄탄히 하고 다가올 불황에 대비하여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나아가 포스트 코로나 불황을 겨냥한 성장전략을 담아야 할 엄중한 시기의 예산이 바로 내년 예산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 바이든 정권이 내세운 ‘과학기술 선도 국가론’에 기반한 신산업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정책에서의 과학 기반의 정책결정은 복잡다단한 예산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디지털 전환)보다 폴리시 트랜스포메이션(PX·정책 전환)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