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제가 알아서 합니다”

입력 2021-11-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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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현 퍼셉션 대표

크리에이티브 컨설팅이 업(業)인지라 주변의 콘텐츠에 늘 귀 기울이게 된다. 특히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완주가 어렵더라도 기획 의도와 핵심 메시지, 주요 인물들의 페르소나 등 개요를 살펴보는데, 드라마 안에는 시대상을 비롯해 인간의 욕구와 결핍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시작한 SBS 금토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지헤중)’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이전 작품에도 관심 있었을뿐더러 주인공의 역할이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등 가까이 있는 크리에이터들이라 흥미를 갖고 1, 2화 모두 챙겨 보았다. 포토그래퍼인 남자주인공 윤재국(장기용 분)의 대사 중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는 말에 뭔가 시원하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긴박한 상황에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재국에게 사진작업을 맡기는 디자인 팀장 영은(송혜교 분)은 불안과 걱정을 내비치며 하나부터 열까지 가이드를 준다.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 결과물의 퀄리티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한참을 듣던 재국은 단호하게 한 마디 던진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이 안에는 ‘당신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으니 이제 그만 불안해하고 나를 믿어 봐라. 나는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프로니까’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답이 하나일 수 없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에는 의뢰자와 제작자 사이에 늘 밀당이 벌어지고 긴장이 감돈다. 배경과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되 어느 시점부터는 업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믿을 수 있어야 좋은 의뢰자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잘 몰라서’ ‘불안하니까’ 등의 여러 이유로 상대에게 완전히 권한을 위임하지 못한다.

이런 일은 조직 내부에서도 자주 벌어지는데 일본의 출판 편집자 쓰즈키 교이치는 자신의 저서 ‘권외편집자’에서 “별 볼 일 없는 잡지가 나오는 이유는 순전히 편집회의 탓이다. (중략) 회의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리스크 헤지(Risk Hedge)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며 아쉬운 순간들을 표현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논하는 자리에서 누구 한 사람의 수긍 혹은 모두의 합의를 위해 애쓰는 상황이 반복되면 아무리 전문성 높은 구성원들이 모였다 하더라도 에지(edge)는커녕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특별한 묘책이 있을까 싶지만 각자가 어떤 태도로 일에 임하느냐에 따라 조금은 개선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을 의뢰하거나 어떤 사안에 대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누구보다 ‘일에 대한 오너십’이 명확해야 하는데, 이는 ‘내가 프로젝트 주인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가 아니라 과정과 결과 끝까지 모두 책임지겠다는 마음이어야 한다. 혼자 다 할 수 없어 전문가들과 협업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선택을 본인이 했다면 그 순간부터 주위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지고 내 판단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결과물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믿고 존중해 달라’는 요구 이전에 의뢰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경청하고 제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와 자기 포트폴리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의 결과를 함께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스스로 자기검열해 볼 필요가 있다. 관점이든 스타일이든 자신이 전문가로서 온전히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와 수없이 쏟아지는 콘텐츠들로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데 똑같은 사람들이 늘 해 오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며, 결과의 예측도 보장도 어려운 때이다. 안으로 밖으로 각자의 도메인이 분명한 전문가들이 모여 새로운 연결과 가치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일의 배경과 동기,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의 해결이든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든 공유되고 합의된 공동의 목표 없이 협업은 불가능하다.

다시 돌아와, 세상의 모든 크리에이터들이 “제가 알아서 합니다”를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일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크리에이티브가 무뎌지지 않고 더 반짝거릴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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