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문재인 대통령의 아슬하고 짜릿한 줄타기 외교

입력 2021-1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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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환 정치경제부 부장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호주가 일본 제품을 불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본 제품을 사든 말든 본인들이 결정할 일이고, 우리도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굳이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에 와서, 그것도 문 대통령을 옆에 세워 두고 이런 말을 한다면 어땠을까? 결례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치 좀 챙기시라는 핀잔 정도는 들을 말이다.

문 대통령은 그랬다. 호주 총리와의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장 단상에서 “한국이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호주와 중국은 어떤 관계인가. 주먹다짐까지는 몰라도 최소 멱살잡이 수준의 갈등을 빚는 중이다. 미국과는 1956년부터 정보연맹인 ‘파이브 아이즈’에 함께 해온 ‘찐친’ 사이다.

모리슨 총리는 또 누구인가. 호주 유권자들이 직전 정부의 친중국 노선에 반발해 정권 교체를 통해 뽑은 국가원수다. 그런 호주인들 앞에서, 그런 모리슨 옆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베이징 동계올림픽 참가를 공식화했다.

문 대통령의 입장은 이해할 만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구하며 실리를 챙기겠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외교원칙이다. 그러니 미·중 갈등 와중에 올림픽 보이콧을 감행하는 것은 무모한 결정일 수 있다. 다만 그 결정을 외교무대에서, 그것도 불참을 선언한 나라의 국가원수를 옆에 세워 두고 공개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호주 순방에서 난데없이 중국 관련 질문을 던진 언론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민한 사안을 물으면 동문서답으로 슬쩍 피해 가는 데 능한 문 대통령이 유독 이 문제에 돌직구로 답한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앞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는 기자들에게 “국내 문제에 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단호함을 보이던 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 확진자 폭증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호주순방을 강행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언행이다. 문 대통령은 광물자원 공급망 확보를 위해 호주를 찾았다. K9 자주포 수출 등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측면도 있다. 쉽게 말해 아쉬운 소리를 하러 호주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양해각서(MOU) 체결이 끝나자마자 그런 말을 했으니 호주 정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 대통령의 언행을 지켜봤을 미국의 속내도 걱정이다. 미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오히려 중국을 고립시킬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물론 대놓고 “불참하라”고 할 만큼 순진할 리도 없다. 그저 대의명분을 앞세우며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을 뿐이다. 미 국무부는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은 “중국의 소수민족 인권 유린과 잔악한 행위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사족을 붙였다. “동맹들과 사전 협의했다”고.

문 대통령은 뭐라고 했을까. 모리슨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로부터도 (보이콧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은 바 없다”고 했다. 미국이 했다는 ‘협의’와 문 대통령이 받은 바 없다는 ‘권유’는 엄연히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측이 ‘알아듣게 말했는데 배신당했다’고 믿어버린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문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늘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한다. 그런데 미국이 적과 동지를 확실히 구분하겠다고 나선 시점에 위험한 도박을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미국에 꼭 필요한 나라’라는 믿음이 있다. 예전엔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북한 잠수함 정보를 한국에 알려주고 감옥살이까지 했던 로버트 김 전 미국 해군정보군 분석관의 말에는 미국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주는 힌트가 숨어 있다.

그는 “미국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진짜 동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한국은커녕 일본조차 진짜 동맹은 아니라는 말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한국은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배신의 대가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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