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고속도로 설계속도 1979년 제정
설계속도 상향 위해 터널ㆍ교각 증가
공사비 기존 고속도로 대비 최대 4배
“스포츠 관광 활성화” vs “실효성 낮아”
정치권에서 불을 지핀 이른바 ‘호남 아우토반’ 건설을 두고 관계부처와 산하기관ㆍ지자체ㆍ토목건설 업계 등이 엇갈린 반응을 내놨다.
앞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지난 6일 '광주 전남지역 6대 공약' 가운데 하나로 광주-영암 ‘초(超)고속도로 건설’을 제시했다.
윤 후보는 “광주-영암 초고속도로를 건설, 광주에서 영암까지 47km 구간을 독일의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우토반'처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포뮬러원(F1) 그랑프리를 개최했던 전남 영암의 특성을 살려 해당 구간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를 해제하겠다는 취지다. 왕복 4차로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하고 주행량 증가에 맞춰 차로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구체적인 일정까지 내놨다. 20대 대통령 임기 시작과 함께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를 시작하고, 임기 말인 2027년에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현재 1시간 10분가량 걸리는 광주-영암 통행시간을 25분으로 단축, 광주와 서남부 연결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라며 “이 구간에서 시속 2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하면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 관광’도 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부처와 산하기관ㆍ지자체ㆍ토목건설업계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다만 대선후보의 공약사항인 만큼, 국토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은 대체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먼저 관련 공약을 찬성하는 쪽은 초고속도로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광주와 전남 주요 지역의 물류산업 활성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다.
여기에 40여 년 동안 그대로인 자동차 전용도로의 '제한속도 상향 재조정'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재 고속도로 설계속도는 1979년에 만들었다. 이제 자동차 성능이 상향 평준화된 만큼, 고속도로 설계속도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의 ‘설계속도’는 우리가 아는 ‘제한속도’와 다르다.
예컨대 제한속도가 시속 110km인 중부고속도로의 설계속도는 시속 120km다. 설계 때부터 시속 120km로 달릴 수 있도록 선회각도와 회전구간의 구배(도로의 좌우 높낮이 차이) 등을 고려했다. 적당한 구배는 곡선구간에서 차가 원심력에 의해 코너 바깥으로 쏠리는 현상을 줄여주는 도로 형상이다.
설계속도가 시속 120km인 중부고속도로는 안전을 위해 이보다 낮은 기준(시속 110km)으로 제한속도를 설정했다.
이런 제한속도를 두고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반응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다양한 안전장비가 추가됐으니, 지금보다 제한속도를 올려도 충분하다는 게 제조사들의 입장이다.
실제로 설계속도의 상향 재조정은 이미 일부 시작됐다. 국토부는 2015년 이후 추진 중인 주요 고속도로의 설계속도를 이미 시속 140km에 맞추고 있다. 지금도 일부 고속도로는 제한속도를 시속 130km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정치권에서 공약한, 시속 200km를 넘나들 수 있는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는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벽이 많다는 게 중론이다.
먼저 일정 구간의 제한속도를 해제하더라도 "물류 활성화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일부 도심 통과구간을 제외하고 사실상 전 국토가 속도 무제한인 독일 수준에 이르러야 물류 산업 활성화가 가능하다.
토질도 걸림돌이다. 윤 후보가 공약한 시속 200km 이상의 초고속도로는 지반이 약한 국내 사정상 건설이 쉽지 않다. 토목업계에서도 이 ‘연약지반’을 문제로 삼고 있다.
연약지반이란 건조물의 기초 지반이 충분한 지지력을 갖지 못하는 땅을 말한다. 압축성이 큰 토질 탓에 도로가 구간별로 침하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반을 다지는 기초공사를 진행한 이후 수개월 또는 수년에 걸쳐 지반을 다지는 '정지' 공사도 필수다.
도로 침하구간을 고속으로 통과할 경우 자칫 주행 안정성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완공 이후 막대한 유지보수 비용이 들 것이라는 우려도 이 때문에 나온다.
시속 200km 이상 주행이 가능하도록 설계속도를 변경하는 것도 문제다. 선회 각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사실상 직선에 가까운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 결국, 불가피하게 교각과 터널 공사가 늘어난다. 토목학계에서는 "공사비가 적게는 2.5배, 많게는 4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사각도 문제다. 독일 아우토반의 경우 사실상 오르막과 내리막을 느끼지 못할 만큼 경사각을 최소화했다. 여기에 주요 나들목과 휴게소의 진출입로 길이도 현재 고속도로보다 2배 이상 길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만일의 사고 때 대응할 수 있는 인프라도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운전자의 안전의식도 뒷받침돼야 한다.
호남 아우토반 공약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정치권의 단골 공약이다.
34~36대에 걸쳐 전남 도정을 책임졌던 박준영 전 전남지사 역시 3선 도전을 앞둔 2009년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기술적ㆍ환경적(연약지반) 문제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추진이 중단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여당 일각에서는 윤 후보의 공약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윤 후보 공약자료에 '47km 구간을 25분 만에 달릴 수 있다'고 나왔던데 그건 제한속도 100km짜리 일반 고속도로를 이용해도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라며 초고속도로 건설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목건설업계 관계자는 "도로의 구간 '침하'는 자칫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가 아닌, 제한속도를 일부 상향 재조정한 고속도로를 세우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