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남자는 여자를 이기자…’ 청년판 을(乙)들의 전쟁

입력 2022-03-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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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현 사회경제부장

“긴급동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이기자.”, “긴급동의요. 여자는 남자를 이기자.”

벌써 40여 년 전인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4학년 당시 반 학급회의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어떤 계기가 됐는지는 몰라도 기억엔 반장을 비롯해 요즘말로 오피니언 리더 격인 나름 반에서 잘나가던 남자 급우들이 먼저 그런 안건을 냈다. 이에 분개한 여자 급우 몇 명이 맞받아쳤고, 이런 공방은 한동안 몇몇 소수의 주도로 계속됐다. 손을 번쩍 들며 긴급동의를 외치던 몇몇 급우들의 행동은 한때 유행했던 코미디 프로그램 봉숭아학당에서 맹구가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번쩍 들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 같은 사태는 이를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고서야 일단락됐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혼을 내셨고, 몇 마디 사자후에 모두는 머쓱해졌다.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도 “남녀는 같이 어우러져 살아야지, 누가 누굴 이긴다는 것이냐”였던 것 같다.

‘이대남’, ‘여성가족부 폐지’부터 ‘1번남·2번남’까지. 그 어느 때보다 소위 젠더 갈등이 격화한 이번 대선을 보면서 기자가 떠올린 40여 년 전 기억이다.

그러고 보면 남녀 간 갈등은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20여 년 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듯, 분명 남녀 간 인식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젠더 갈등이 불거진 더 근본적 원인은 저성장과 함께 과거보다 신장돼 가는 여성 지위, 그리고 갈등을 봉합하기는커녕 부추긴 정치권을 비롯한 오피니언 리더들에 있다.

우선 빠르게 진행된 저성장 그늘은 청년들의 사회 진출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책 ‘명견만리 - 대전환, 청년, 기후, 신뢰 편’에서는 의자 세 개와 사람 여섯 명으로 비유한다. 음악이 흐르다 멈추면 재빨리 의자에 앉아야 하는 게임에서 승자는 세 명뿐이다. 여섯 명에게 1년의 시간이 주어져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도 하고 닭고기도 열심히 먹어 근육을 키워봐야 다시 게임을 시작하면 의자 수는 여전히 세 개뿐이다. 1년간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세 사람은 여전히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그런 의자가 지금 줄고 있다. 경쟁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

반면,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고 있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선 것은 2009년의 일이다.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까지만 하더라도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집에서는 딸을 상업고등학교에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19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여성은 취업보단 결혼하는 것, 요즘말로 ‘취집’이 통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든 대학이든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하고 집에 있는 여성들을 중매쟁이들이 ‘신부 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소개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확산한 것도 아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실제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리천장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29개국 중 29위로 10년 연속 꼴찌다. 이 지수는 OECD 회원국의 남녀 고등교육 격차, 소득 격차, 노동 참여율, 고위직 비율, 육아휴직 현황 등 지표를 종합평가한다. 한국은행이 최근까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풀어갈 대안 중 하나로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유도를 꼽고 있다.

여성에 대한 사회인식도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앞서 말한 586세대들이 청년이었던 1992년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던 ‘후남(김희애 분)’과 아들이라고 귀한 대접을 받던 ‘귀남(최수종 분)’이 인기를 끈 바 있다. 그리고 2016년엔 후남의 딸뻘이라 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화두가 됐었다. 모두 여성 차별을 주제로 한 내용으로 인기만큼 차별이 컸음을 방증한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은 청년 갈라치기에 혈안이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들을 소위 ‘을(乙)들의 전쟁’으로 내몬 셈이다.

정치권부터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정치권은 또 경제개혁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과 함께 청년정책을 복지가 아닌 투자 개념으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야 한다. 제도개선을 통한 남녀 간 평등 내지 형평성도 추구할 필요가 있겠다. 청년들 역시 기득권의 갈라치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귀남이와 후남이, 82년생 김지영 모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임을 곱씹어봤으면 싶다.

불현듯 40여 년 전 선생님은 지금의 정치권과 청년들에게 어떤 사자후를 해주실까 궁금해진다. kimnh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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