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보니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메르세데스-벤츠, 그러니까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그룹의 현지취재를 위해 싱가포르 출장길에 올랐는데요. 늦은 오후, 창이국제공항은 붐볐으나 싱가포르 도심은 뜻밖에도 한가했습니다. 모든 상점이 일찍 문을 닫던 문화가 현지에 존재했으니까요. 호텔에 도착한 다음, 취재 카메라용 배터리를 사기 위해 근처 대형마트를 찾았습니다.
다행히 호텔 직원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대형마트를 알게 됐지요. 그녀는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는 ‘캐리포어(Carrefour)’가 10분 거리에 있다”며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줬습니다. 스마트폰조차 없던 시절, 그녀가 건넨 ‘약도’를 손에 쥐고 캐리포어를 향했습니다. 혹여나 처음 들어본 대형마트 이름을 잊어버릴까 싶어 작은 목소리로 “캐리포어…캐리포어…캐리포어…”를 읊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마침내 커다란 대형마트 ‘캐리포어’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낯설었던 캐리포어가 순간 굉장히 낯익은 브랜드로 둔갑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캐리포어’는 당시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프랑스에서 시작한 다국적 유통기업 ‘까르푸’였습니다.
같은 단어를 두고 싱가포르에서는 “캐리포어”로 읽고, 우리는 “까르푸”라고 말하며 썼던 것이지요. 누가 맞고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양한 다국적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생긴, 또 하나의 ‘다름’일 뿐이지요.
그러나 최근에는 다양한 동영상 포털과 온라인 매체가 발달하면서 단순한 ‘다름’이 아닌, ‘잘못됨’이 널리 퍼지고 있어 여러 언어학자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관련 용어들은 그 자체가 외래어인 탓에 우리 것으로 들여와 쓰는 과정에서 여러 병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뿐인가요. AI 기술을 바탕으로 자율주행차가 코앞에 닥친 21세기에도 우리는 운전자와 나란히 앉은 옆좌석을 ‘조수석’이라고 부릅니다. 도대체 누가 ‘조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자동차 회사가 이 좌석을 ‘조수석’이라고 부르고 다양한 선택 사양에 ‘조수석’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좌석은 조수석이 아닌 ‘동승석’ 또는 ‘동반석’이라고 쓰는 게 적확합니다.
‘SUV 차량’이라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를 의미하는 SUV(Sports Utility Vehicle)는 2가지 이상의 기능을 하나의 자동차에 담은, 다양한 기능을 포함한 네바퀴굴림 자동차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차종 다양화가 이뤄지면서 굳이 네바퀴굴림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SUV들이 등장했습니다. 전통적인 3박스 형태의 세단보다 SUV가 더 많이 팔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를 두고 ‘SUV 차량’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 공중파와 케이블 뉴스 채널에서도 뉴스 자막에 겁도 없이 ‘SUV 차량’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SUV라는 이름 속에 자동차를 뜻하는 ‘V(vehicle)’가 포함돼 있습니다. ‘SUV 차량’이라는 말은 분명한 ‘동어 반복’입니다. SUV 차량 대신 그냥 ‘SUV’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자동차를 말할 때 ‘차량’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틀린 말입니다. 차량의 ‘량(輛)’은 열차의 한 칸을 의미합니다. 열차 칸을 셀 때 ‘한 량, 두 량, 세 량’을 말할 때처럼 스스로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이른바 ‘피견인차’를 ‘차량’이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이런 언어 병폐가 일반화하면서 국어학자들의 고민도 깊어졌습니다. ‘표준어’를 규정하는,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이른바 ‘보편 타당성’을 고려해 “자동차를 차량이라고 부르는 병폐를 인정하자”는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다만 이런 그릇됨에 맞서 본지는 마지막까지 바른 단어를 한번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