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에너지 자유무역 시대 종말…“원자재, 다음 경제위기 중심”

입력 2022-06-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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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에 지정학적 경쟁이 시장보다 우위에 서게 돼
서구권·신흥국·중동 산유국, 시장 좌우할 ‘3대 축’ 부상
러시아, 최대 시장 유럽 잃어 에너지 산업 약화 불가피
미국도 대러 제재로 신뢰성에 금 가

▲미국 뉴멕시코주 러빙턴 인근의 한 유전에서 펌핑잭이 석유를 뽑아올리고 있다. 러빙턴/AP뉴시스
▲미국 뉴멕시코주 러빙턴 인근의 한 유전에서 펌핑잭이 석유를 뽑아올리고 있다. 러빙턴/AP뉴시스

글로벌 에너지 자유무역 시대가 끝이 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 세계 에너지 지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으며, 석유와 천연가스의 흐름이 수요와 공급보다 지정학적 경쟁의 영향을 받는 새 시대가 오고 있다고 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진단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석유와 천연가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격이 높은 시장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했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이동은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에 미국과 유럽이 대러시아 무역 제재에 나서면서 갑자기 끝나게 됐다.

이번 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재에 동의했다. 해상에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해상보험도 차단하기로 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시장의 새로운 질서가 구체적으로 어떨지는 앞으로 수년간 불분명한 상태로 남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시장이 이전보다는 덜 자유분방할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러시아 더는 에너지 슈퍼파워 될 수 없어”

WSJ는 에너지 시장을 좌우할 ‘3대 축’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들은 막대한 경제력과 구매력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 터키 등 거대 신흥국들은 서방의 압박에도 러시아와 계속 거래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기타 중동 산유국들은 향후 몇 년간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도 시장점유율 확대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채스 프리먼 전 사우디 주재 미국 대사는 “우리는 진정한 역사의 변곡점 위에 있다”며 “유럽은 더는 러시아를 주요 에너지 공급국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됐다. 제재가 해제되더라도 유럽 국가들은 값비싼 새로운 인프라 확보에 나서고 장기적으로 러시아를 대체할 공급국을 모색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에너지 지도를 그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많은 전문가가 러시아 경제 중추인 에너지 산업이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 확실시된다고 예상하고 있다. 유럽이라는 최대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서구의 금융과 기술 제재는 러시아가 석유 매장량과 생산능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약화시키게 된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부회장이자 저명한 석유산업 역사가인 대니얼 예르긴은 “에너지 초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에너지 정치화’ 미국의 위상도 흔들

그러나 새로운 에너지 지형은 미국의 위상도 뒤흔들 수 있다. 미국은 세계 무역의 보증인 역할을 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는 석유 거래의 기본 통화가 됐으며 이는 세계 경제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프리먼 전 대사는 “미국이 자국 금융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서 부를 저장하는 장소로서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국은 에너지 무역을 정치화했다”고 덧붙였다.

이제 사우디와 인도, 기타 신흥국은 달러 대신 다른 통화로 에너지 거래를 수행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석유 결제 대금을 루블화로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너진 에너지 자유무역, 새 글로벌 경제 위기 불씨

미국 재무부 관리였으며 현재 크레디트스위스에서 단기 금리 전략 대표인 졸탄 포자르는 “새 질서는 에너지 무역을 덜 효율적이고 더 비싼 것으로 바꿀 것”이라며 “원자재가 다음 글로벌 경제 위기 중심에 놓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독일이 러시아산 원유 금수에 나서면 1~2주 안에 함부르크에 도착할 수 있었던 해당 원유들이 몇 개월이나 걸려 중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반대로 일반적으로 아시아로 갔을 중동산 원유가 유럽으로 더 긴 항해에 나설 것이다. 이러한 비효율성은 에너지 무역을 뒷받침하는 운송과 보험, 자금조달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 소재 국제에너지포럼(IEF)의 조지프 맥모니글 사무총장은 “수요 증가 속에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에너지 제재로 생산량이 줄어들면 전 세계 석유가 물리적으로 부족해질 수 있다”며 “러시아가 수출시장에서 제외된다면 결국 수요마저 죽이는 글로벌 경기침체가 올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중동 산유국, 새 에너지 지형서 승자 되나

중동 산유국들이 새로운 에너지 지형에서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사우디와 다른 걸프 국가들은 최근 수년간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로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를 다각화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제 중동 산유국들에 더 많이 석유를 생산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데니스 블레어 전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 국익에서 중동의 중요성이 다시 커졌다”며 “우리는 교통수단을 전기화하고 에너지원을 더 다각화하기 전까지는 사우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우디 국영 석유 대기업 아람코는 유가 상승과 유럽 등에서의 더 많은 수출 요청에 힘입어 최근 애플을 제치고 세계 최대 시가총액 기업 지위를 탈환했다.

한 사우디 관리는 “지난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계획을 지키라고 압력을 가했다”며 “지금은 더 많은 석유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기다”고 꼬집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OPEC 산유국으로 구성된 OPEC 플러스(+)는 전날 회의에서 7~8월 각각 하루 64만8000배럴 증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이전 증산량인 하루 약 43만2000배럴에서 50% 증가한 것으로 사우디가 원유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말 사우디 방문을 고려하고 있다. 또 다른 사우디 관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 세계가 사우디의 석유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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