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의사도 아프답니다

입력 2022-07-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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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장·내과 전문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배변을 위해 변기에 앉았는데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항문에 병이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미뤄뒀던 병이 탈이 난 모양이다.

예정된 진료 일정 때문에 간단히 좌욕만 하고 진통제로 우선 통증을 조절할 수밖엔 없었다. 엉거주춤 선 채로 진료를 보는데, 내 표정과 자세가 이상했는지 자주 다니시던 할머니가 궁금증을 폭발하셨다.

“아이고 우리 원장님도 어디가 안 좋으신가 보네?”

“아, 제가 몸이 좀 아파서요.”

“근데 의사도 아파요?”

“그게….”

차마 아픈 부위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 자세를 보니, 음 그래. 그래. 똥꼬가 아픈가 보네. 똥꼬가!”

할머니는 마치 어려운 퀴즈의 정답이나 맞춘 양,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신다.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해 입을 다물고 있자니 할머니는 청산유수로 항문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인도 아기 낳을 때 치질로 고생을 해봐서 잘 안다며 조심해야 할 음식부터 좌욕하는 방법, 그리고 어느 병원이 항문 수술을 잘한다는 말씀까지 의사보다 더 의사처럼 줄줄이 꿰신다. 결국은 항문질환에 좋다는 자세까지 따라 시키시는데, 그걸 또 따라 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빙그레 같이 웃으시던 할머니도 당신이 좀 과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주섬주섬 가지고 온 짐을 챙기며 툭 한마디를 남기신다.

“근데, 원장님이 건강하고 오래 살아야 이 늙은이가 덕을 본다우. 잘 치료하고 빨리 나아요.”

의사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보니 아프지 않고 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돌아보니 내가 병이 있을 때, 안색이 안 좋아 보일 때면 꼭 무정한 듯 툭 던지는 말투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던 분이 계셨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그런 환자분들의 기도와 걱정 덕에 비바람 불고 큰 파도가 밀려오는 너울 속에서 20년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병원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는 순간이었다.

다음 환자 진료를 보기 위해 모니터에 눈을 둔 순간 할머니가 빼꼼히 문을 열고 무언가를 책상 위에 놓더니 휙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배변에 좋다고 광고에 나오던 음료였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이를 먹다 보니 눈물이 많아진 요즘이다. 아픈 항문을 부여잡고 일어서는데 어찌나 할머니의 걸음이 빠르던지….

“할머니께서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란 말이 입속에서만 맴돌고 말았다.

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장·내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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