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휴가 시즌을 앞두고 있지만 미국은 이미 5월 말부터 시작됐다. 대학이 5월 중순 여름방학에 들어가고, 마지막 주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기점으로 해수욕장과 휴양지들도 일제히 오픈했다. 시즌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분위기는 영 썰렁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때문이다. 5월 물가상승률은 8.6%로 41년 만에 또 정점을 찍었다. 코로나에 묶여 폭발 직전 상태인데, 이번엔 장기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연방 통화당국이 금리를 자이언트 스텝으로 올리고, 추가 인상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체감 물가는 가위 살인적이다. 여행 전문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에서 휴가를 보낸다 하더라도 2년 전에 비해 경비가 34%나 더 든다. 항공요금은 48%, 숙박비는 46% 각각 올랐고, 렌터카 비용은 무려 70%나 뛰었다. 30~50%가량 치솟은 기름값과 20% 안팎 오른 외식비 등을 감안하면, 서민들은 휴가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는 실정. 미국인의 43%가 휴가를 아예 접거나 비용을 대폭 줄이겠다고 대답했고, 20~30대 밀레니얼 세대의 89%가 인플레이션 때문에 휴가에 차질을 빚을 거라고 응답했다.
2년간 여행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 난 데다 휴가 때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면 팔불출 소리 듣기 십상인 미국인들이지만, 서민들은 올해에도 눈물을 머금고 시쳇말로 ‘방콕’ 생활을 또 해야 할 판이다. 팬데믹 기간 중 운항 편수와 인원을 대폭 줄였던 항공사들이 급증하는 여행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발생하는 운항 취소, 잦은 스케줄 변경 등도 해외여행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어부지리를 챙긴 건 주립공원 캠핑장과 도심 근교 와이너리, 리조트 등 국내 관광지들. 미국인의 60%가 돈 많이 들고 이동이 복잡한 해외여행 대신 가까운 캠핑장에서 자전거도 타고 캠프파이어도 하는, 이른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으로 대체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뉴욕타임스도 여행전문가 롭 스턴의 말을 빌려 “거기 말고, 여기로 가라(Go Here, Not There)”라는 제목으로 알뜰휴가 대안을 제시했다. 스턴은 “남들이 다 가는 데 가지 말고, 비슷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가까운 곳을 택하라”고 조언한다. 예컨대, 뉴요커들에겐 울창한 숲과 호숫가 트레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와이너리가 밀집돼 있는 뉴욕주 북부 핑거레이크 주변을 권했다. 또 위스키 산지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는 대신 미국산 위스키 버본의 본고장 켄터키 버본트레일에 가서도 위스키 시음이나 제조과정 등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고, 하룻밤 숙박비가 평균 378달러(약 49만 원)나 하는 하와이 대신 캐리비안 일대나 멕시코로 가면 3분의 1 비용으로 화산과 해변, 폭포, 수상 스포츠 등을 두루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해외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고 싶으면 그 나라 민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나 시장을 찾아 가라고 권고한다. 아시아 문화를 경험하고 싶으면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등 도시마다 자리 잡고 있는 차이나 타운과 코리아 타운, 프랑스 문화와 음식을 맛보고 싶으면 캐나다 퀘벡과 몬트리올 채소시장, 우크라이나 음식이 궁금하면 클리브랜드로 가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행업자들은 이번 휴가 시즌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알리안츠파트너스USA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지친 미국인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휴가를 떠나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이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휴가를 떠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이른바 ‘휴가지수’가 팬데믹 이전에 통상 43% 수준이었으나, 팬데믹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0년에 26%로 최저점을 찍고 올해는 60%로 크게 높아졌단다.
하지만, 본격적인 휴가 시즌인데도 주변에서 휴가를 다녀왔다는 얘길 아직 듣지 못했다. 이래저래 미국인들은 마스크는 벗었지만, 코로나19 그림자에서는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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