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거의 유일한 천국, 카지노와 프로야구가 없고, 주식시장이 열리지 않으며, 술꾼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호객꾼이 없는 땅이다. 그곳의 주민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도착한다. 평양은 기적이 예사로 일어나는 땅이다. 자기가 사는 영토가 유토피아라고 선전하는(혹은 굳게 믿는) 사람들이 점거한 땅에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내면이 무의미나 공허함으로 오염될 여지는 희박하다. 일찍이 토마스 모어가 통찰했듯이 모든 유토피아는 섬이다. 평양은 내륙에 고립된 섬이다. 평양 주민의 고통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유토피아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 주민은 늘 통치체제의 불안정성 속에서 견뎌야 할 불행의 양상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더 불행하다. 이 체제에서 괴물과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일은 다반사다. 이 체제의 주민들은 자유가 가장 흔한 공공재라고 믿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일체의 음식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너무나 흔한 의자들, 너무나 많은 채무들, 너무나 많은 사유재산도 자유주의체제의 유산이다. 자유는 종종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자유는 제약을 받을수록 비로소 자유라는 조건 속으로 솟구쳐 오른다. 사유재산은 내 자유를 보호하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확신하지만 실은 그 자유는 신처럼 헐벗은 자유다. 우리는 그 자유 속에 구속당한 채 살아간다.
회의주의자들은 아침마다 빵집에서 빵을 사고, 세탁기에 빨랫감을 밀어 넣으며, 오후에는 개를 끌고 공원을 산책한다. 그들의 일상은 일견 평화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안에는 온갖 생활상의 번민과 고통들, 공허함으로 들끓는다. 좀도둑들은 금은방 보석들을 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오래 전 마추피추로 떠나겠다는 지인은 동네 카페에 자주 출몰한다. 아이가 손에서 놓친 풍선은 공중으로 떠오르고, 공중으로 솟구친 분수의 물은 땅으로 하강한다. 비 온 뒤 무지개가 뜬다. 그 무지개를 끊어 먹고 싶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속절없이 슬프다. 나비, 모란꽃, 까르륵 웃는 아이들. 나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영원을 엿본다. 영원은 오직 찰나에서만 반짝이는 법이다.
오늘은 흐리고, 습도는 높다. 동물 사체의 부패가 빠르게 진행될 만한 날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반 없이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간다. 열반이라니? 터무니없는 희망이다. 어제 죽지 못한 사람이 오늘 새로운 날씨 아래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죽고 싶다. 아니 죽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 사이 어디쯤에 실존의 명분을 둔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유언비어이고, 의심쩍은 루머이며, 곰팡이 포자와 같이 번져나가는 절망을 수락하는 일이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을 삼키고 뻔뻔한 얼굴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게 희망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오늘 살아남은 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제는 병원을 다녀왔다. 나의 건강은 크고 작은 질병들을 담보로 잡는다. 노화와 질병은 예견된 불행이지만 우리는 그 불행을 한사코 뒤로 미룬다. 의사는 잠을 잘 자느냐고 묻는다. 나는 잠자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한다. 의사는 음식을 잘 먹느냐고 묻는다. 나는 소식이지만 잘 먹고 소화기능도 여전하다고 대답한다. 그제서야 의사는 당분간 내 건강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믿기로 한다.
어제는 훌쩍 바다를 다녀왔다.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고, 내 안의 권태감이 위험하게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바다는 착함의 온전함으로 출렁인다. 저 출렁이는 것 앞에서 우리는 자기 안의 거짓을 숨길 수가 없다. 남자들이 바다에 와서 참회의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바다는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동물이다. 아, 바다! 나는 다시 살아봐야겠다, 지중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작가가 썼듯이, 바다는 가난조차 사치로 바꿔버린다. 바다 앞에서 우리의 남루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바다는 그 자리에 있고, 그 사실에 나는 세상의 질서는 견고하고, 따라서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하다고 안도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는 게 서툴고 여러 관계들이 불편하다. 살아 있음의 순간은 괴로움과 불편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인간 집단에게서 자신을 완벽하게 떼어놓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나는 남과 어울려 사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나는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 속에 머무는 걸 좋아한다. 주식 거래에서 큰 손실을 입은 사람은 새로 주식 투자에 뛰어들려는 사람을 애써 말리지 않는다. 불행에 뛰어드는 이들을 방관하기. 그것은 투자 손실의 평준화가 자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리라고 믿는 까닭이다.
나의 태어남은 내게는 실존 사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태어남이 하나의 우연이며, 우스꽝스러운 사고였다는 것을 안다.”(에밀 시오랑 ‘태어났음의 불편함’) 우리가 모르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누군가 이승의 삶을 마치고 돌아가는 동안 새로운 존재들이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난다. 이 신생의 존재들은 지구에 늦게 도착한 인류의 미래다. 태어남의 우연이라는 기적은 영원회귀 할 거라는 기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
오늘 등기우편물은 반송되고, 산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이코패스는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동물을 학대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지옥에 떨어기를 바란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말이다. 동물의 사랑스러움을 도무지 모르는 멍청한 존재들.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를 학대하는 이들의 뇌는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이별을 통고한 애인을 살해한 남자가 애인 시신을 옆에 두고 며칠 동안 넷플릭스 동영상을 보다가 붙잡혔고, 전자 발찌를 끊고 달아났던 성범죄자가 렌트카에서 잠들었다가 붙들렸다. 자기가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였고 삼성가 이병철의 양자였다고 주장하는 ‘허경영’의 허언은 일부에선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거짓말은 어디서나 증식한다. 나는 어떤 거짓말은 참으로 믿고 싶다. 예쁜 애인의 거짓말들.
오늘 내게 인사한 당신이 누구인지를 나는 모른다. 나는 오늘도 열반에 실패한다. 열반에 실패했어도 뜨거운 수제비 한 그릇을 비우고 맞는 바람 부는 저녁의 소슬함은 다정하다. 나는 밀크셰이크와 고양이를 좋아하고, 진공관 앰프로 듣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한다. 이제 동네 카페에서 책 몇 쪽을 읽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근육 손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아직은 괜찮다. 나는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하루의 몇 시간은 산책하는 데 쓴다. 우리의 보람은 사유재산이나 은행잔고, 혹은 가상화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살지 못한 내일에 대한 동경에 있다. 나는 밤에 등불 아래서 젊어서 일찍 죽은 시인의 시집을 설레며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