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이 5일 러시아 소치로 날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반년째 계속되는 와중에 만난 두 정상은 협력을 다짐했다. 그렇다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러시아에 줄을 선 것은 아니다. 불과 2주 후인 18일 그는 우크라이나 르비우로 건너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났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함께한 3자 회담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양자 협력을 논의했다.
더욱이 전쟁 초기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공격용 무인기(드론)는 러시아의 진격을 막는 일등공신이었다. 전투 반경 150km, 비행 속도 130km/h, 최대 적재중량 50kg에 스마트 유도탄 MAM-L을 장착할 수 있는 터키산 드론 ‘바이락타르 TB2’는 전세를 역전시킨 게임체인저로 맹활약했다.
우크라이나를 도우면서, 러시아 손도 놓지 않는 튀르키예의 ‘이중’ 행보는 우크라이나가 패해서도, 러시아가 져서도 안 되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연관돼 있다. 흑해를 두고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는 튀르키예는 완충지대로서 우크라이나가 필요하다. 오랜 ‘숙적’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억제해야 하는 튀르키예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패배는 상상할 수 없다.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한 건 곧 자국 안보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대놓고 충돌할 수도 없다. 튀르키예의 경제와 국내 정치가 러시아 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양국 교역량은 260억 달러(약 35조 원)에 달했다. 러시아는 튀르키예 농산물의 최대 수입국이다. 튀르키예는 천연가스 수요의 40%, 석유의 25%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2021년 기준 튀르키예 관광객의 20%는 러시아인이었다.
또한 튀르키예가 시리아 북동부에 거점을 두고 있는 쿠르드족을 소탕하는 데 러시아의 암묵적 용인이 필요하다. 튀르키예는 쿠르드족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며 자국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2016~2019년 시리아 북동부에서 3건의 군사작전을 펼친 튀르키예는 러시아의 중재로 쿠르드민병대(YPG)를 국경에서 30km 밖으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2011년부터 이어진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시리아 대외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 북동부에서 군사작전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는데 러시아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를 도우면서 러시아와도 등질 수 없는 숙명 앞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군사와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지정학적 취약성을 기회로 활용했다. 우크라이나에 드론을 공급해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서방의 ‘신임’을 얻었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대(對)터키 무기 금수 조치 재협상을 견인하는 지렛대가 됐다. 유럽은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무기 거래도 꾹 참았다.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이 중단된 유럽에 아제르바이잔 천연가스를 보내 숨통을 틔워준 게 튀르키예였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행보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상기시킨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 ‘손자병법’은 전쟁을 정치의 실패라고 봤다. 그러면서 정치 실패에 따른 폭력적 결과인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자국의 이익을 전략적·현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게 아니라 전쟁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도덕적 행동이라고까지 했다. 손자의 관점에서 줄타기에 능한 에드로안은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이다. 우크라이나, 서방, 러시아와 관계를 모두 유지하면서 이를 활용해 자국에 닥칠 최악을 피하는 현실주의적 전략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