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후 이 같은 질문을 종종 받았다. 이 전쟁이 최소 1년 넘게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 질문의 답은 점점 더 그린딜 달성이 어렵다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20년 넘게 유럽통합을 연구해온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린딜 달성이 좀 더 촉진되리라고 전망해 본다. 경제나 안보 측면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이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측면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답을 찾아야 한다.
에너지 안보와 그린딜 달성은 상충?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게 에너지 안보다. 공급처가 다양하면 좋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이게 유럽, 특히 독일의 문제였다. 독일(당시 서독)은 1973년부터 옛 소련으로부터 육상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제공받아왔다. 냉전 시기 동서 갈등이 고조됐을 때에도 소련은 서독에 천연가스를 팔았다. 탈냉전 시기인 2011년부터 러시아에서 독일의 발트해로 직접 오는 해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노르트스트림1)이 가동돼 독일은 기존의 육상 파이프라인 이외에 이 라인도 이용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해저 파이프라인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어 왔다.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1 정비를 이유로 가스 공급량을 전쟁 발발 전의 20%로 줄이더니 지난달 31일 일시적으로 공급을 중단했다. 이어 이달 5일 미국과 EU 등이 대러시아 제재를 해제하지 않는 한 이 파이프라인을 가동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러시아의 푸틴이 봤을 때 미국을 중심으로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EU 회원국들을 분열시킬 수 있는 카드 중 하나가 가스 공급 차단이다. 에너지 가격이 최소 2~3배 오르고, 아무리 에너지 사용을 줄여도 이전보다 더 춥고 비싼 겨울을 나야 하는데 과연 EU 회원국 시민들이 정부를 압박하지 않을까? 거의 두 자릿수에 육박하는 물가상승률에 한참 못 미치는 임금, EU 회원국 시민들이 이런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통한 평화협상을 더 강력하게 요구하거나, 대러시아 강경정책을 완화하라는 요구가 나오지 않을까? 푸틴은 이런 셈법으로 천연가스 공급량 조절을 이제껏 유용한 무기로 사용해 왔다. 다만 천연가스 공급의 완전 차단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최후의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이 카드를 사용했다.
정책은 위기 때 실행이 촉진될 수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상당수의 EU 회원국들이 값싼 러시아 에너지에 중독됐었는데 이번 전쟁은 이들에게 이젠 정신 차리라는 거센 충격을 주었다. 단기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카타르나 알제리 등 다른 에너지 공급원 발굴에 주력한다. 독일의 경우 올해 말 가동 중단할 원자력 발전소 3기의 가동 연장을 긍정적으로 논의 중이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단기적인 조치이다. 중장기적으로 화석연료 중독에서 탈피하려면 재생에너지에 더 투자하는 게 필수다. 그리고 EU는 세계에서 최초로 2050년까지 탄소중립적인 대륙을 만들겠다는 그린딜 계획을 2019년 12월에 발표했고 이제까지 이를 앞당기는 조치를 시행해왔다. 재생에너지 비율을 늘리는 것도 다양한 에너지 공급원의 하나이다. 물론 대규모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에너지 안보와 그린딜 달성은 얼핏 보면 상충하는 듯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동전의 양면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55% 감축 목표
전쟁 발발 전에 EU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과 비교해 55% 줄이기로 합의했다. 2021년 7월에 관련 법이 발효되어 EU 27개 회원국은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EU의 20-20-20 계획이 달성된 후 2050년 탄소중립적인 대륙 달성을 위한 중간 단계가 55% 감축이다. EU는 2020년까지 1990년과 비교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20%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20% 높이고, 재생에너지 비율을 20%로 올리겠다는 20-20-20 계획을 21세기 초에 발표했고 이를 달성했다.
7월 유럽의회는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의 그린딜 달성 정책 제안이 미흡하다며 더 보강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의회는 이때 원자력을 친환경에 포함하는 결정을 내렸다.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한다는 매우 엄격한 조건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더욱 줄이기 위한 것이다.
녹색당이 열쇠 쥔 유럽의회 그린딜 촉진
2019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녹색당의 약진이 두드러졌고 이후 유럽의회는 EU에 그린딜을 가속화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왔다. 유럽의회에서는 녹색당의 표결에 따라 정책 방향이 변경될 수 있어 녹색당이 종종 캐스팅 보트를 쥐곤 한다. 2005년부터 운영된 EU의 탄소배출권 시장(Emission Trading Scheme, ETS)에서는 현재 27개국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40%만 거래된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과 화학 산업 등은 연간 온실가스 허용 배출량이 있고 그 규모가 점점 축소돼왔다. 여기에 수송과 난방 산업도 2026년부터 포함되도록 하는 안건을 유럽의회는 관철시켰다. 이렇게 되면 온실가스 배출이 더 줄어든다. 7월 초에 유럽의회는 이런 방향의 ETS 개혁을 승인했다. 2035년까지 EU 회원국에서 내연기관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한다는 내용도 이때 통과됐다. 또 탄소국경조정 메커니즘(탄소세)도 유럽의회의 요구대로 2027년 실행이 승인됐다. 중국이나 우리와 같은 탄소 순배출국의 공산품이 EU로 수입될 때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어도 별도의 세금이 부과된다.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라는 거센 압력이 탄소세이다. 이와 함께 2021년 7월부터 EU는 팬데믹이 초래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7500억 유로의 경제회생기금(ERF)을 각 회원국에 지원한다. 27개 회원국은 지원 금액 가운데 37%를 기후변화와 지속 가능한 환경 사업에 지출해야 한다.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의 이 분야 예산 집행을 매년 감독한다.
규범적 권력 EU, 그린딜 달성 매진할 것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EU가 그린딜 달성에 매진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경제전략이 아니라 EU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경제 무대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일자리 창출과 혁신을 지속하겠다는 게 EU의 장기적 비전이다. 경제성장과 환경보호를 함께하는 신성장 전략을 만들어 세계에 확산하겠다는 포부다. EU는 군사력으로는 미국과 중국에 대적할 수 없고 대적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EU가 앞으로도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행위자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기후위기 대응을 주도해야 한다. EU 27개 회원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인식을 암묵적으로 공유한다. 후발 주자였던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도 지난달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켜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고 있다.
EU는 다른 분야에서도 새로운 규범을 만들고 확산해 왔다. ‘가파’(GAFA, 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라 불리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 규제에 EU보다 더 앞장선 행위자는 없다. EU가 공정경쟁위반 등을 이유로 이들에게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때마다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을 차별한다며 오히려 기업들을 두둔해왔다. 미국은 빅테크라는 거대 기업과 소비자 간의 충돌을 소비자 권리라는 편협한 틀에서 인식한다. 반면에 EU는 이를 인권으로 인식한다. 이 때문에 빅테크 규제에서 미국과 EU 간의 엇박자가 계속 나온다.
여기에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중앙은행 가운데 그 어디보다도 그린딜에 앞장서 왔다.(7월 14일 자 유러피언 드림 22 ‘그린딜 앞장서는 유럽중앙은행’ 참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EU는 단기적으로 석탄 발전 비중을 높이고 원자력 발전소도 더 가동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어쩔 수 없는 조치이다. 앞으로 2030년까지 8년 조금 더 남았다. 중간 목표인 55% 달성을 먼저 지켜보자. 에너지 생산 믹스에서 재생 에너지 비율을 줄이고 있는 한국 정부도 국제사회의 흐름을 명심해야 한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