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졸업 후 가끔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다가 십여 년 전부터 연락이 끊겼던 친구입니다. 얼굴도 볼 겸 저한테 와서 건강검진도 받을까 해서 연락했다고 합니다. 그러자고 하고 날짜를 잡아주고 공복으로 병원에 오라고 했습니다.
십여 년 만에 찾아온 친구는 어느덧 중년의 향기가 물씬 났습니다. 가끔 진료를 하다 보면 내 나이 또래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곤 합니다. 오십이 넘어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 주름도 보이고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환자들의 눈에 저 역시 그렇게 보이겠지요. 오랫동안 저와 만나 온 환자들에게서도 원장님도 나이가 드시네요, 머리에 흰 머리가 보이고요,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는 혈압이 높았습니다. 혈압이 높은데 약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자기는 병원에 오면 긴장해서 혈압이 올라간다, 오랜만에 너 만나서 흥분해서 그렇다 둘러댔습니다. 다음에 또 올 테니 그때도 높으면 반드시 약을 먹겠다고 합니다. 백의 고혈압이라고 병원에만 오면 혈압이 높아지는 경우일 수도 있어서 집에서 자가 혈압계로 꼭 혈압을 자주 재 볼 것과 다음 진료 날짜도 잡아주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와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이들 대학 보낸 이야기, 십여 년 세월의 틈새를 채워나갔습니다. 친구는 몇 번의 이직이 있었고 최근에야 안정된 직장을 구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키우랴, 가장의 역할을 해내랴, 중년의 남자들이 사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그동안 못 만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성당에서 하는 결혼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제가 집전하는 결혼예식은 낯설고 엄숙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전례들을 따라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고 경건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가들이 신비로웠습니다. 예식이 끝날 즈음 사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식을 진행할 때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아닌, 신랑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 목소리였습니다. “사실 저는 신랑의 친구입니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 결혼예식을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친구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 예식을 마치려 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크고 힘찬 목소리로 “OO야 잘 살아라!”라고 외쳤습니다. 그 어떤 주례보다 더 기억에 남는 축하의 말이었습니다.
저녁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잘 들어갔지? 반가웠어. 건강하게 살자. 다음에도 혈압 높으면 꼭 약 먹기로.”
친구에게 답장이 옵니다.
“그려. 이제 니가 내 주치의 해라.”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