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금융시장을 뒤흔든 제도적 반달리즘이 영국에만 있을까? 23일 정부는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개최해 대규모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밝혔으나 이미 신뢰를 상실해 아수라장이 된 국내 채권·자금 시장에 뒤늦은 대책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 당국이 좀 더 선제적으로 관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 하면 영국보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서도 아수라장을 예고하는 제도적 반달리즘이 최근 몇 달간 방치되는 게 목격됐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최근 혼란의 원인은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섰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대해 돌연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 때문이다. 하지만 레고랜드 사태 몇 달 전부터 크레딧 채권시장에서는 불안이 누적되고 있었다.
은행 대상의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 규제를 앞두고 현금 확보에 나선 은행들이 줄지어 채권을 발행하면서 대규모 물량을 시장에 쏟아냈다. 우량채가 채권시장 자금을 빨아들이자 나머지 회사채들은 발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또 다른 우량채인 한전채도 시중자금 싹쓸이에 가담했다. 레고랜드 사태 이전부터 채권시장서 유동성이 마르고 신용스프레드가 크게 확대(회사채 금리 상승)되는 등 불안이 고조됐고, 이런 상황에서 레고랜드 사태가 불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들은 왜 갑자기 채권을 폭발적으로 발행했을까. ‘LCR’라는 국제적 제도 때문이다. 6월 초 당국은 코로나 사태 때 85%까지 낮췄던 원화 LCR 비율을 올해 말 92.5%, 내년 3월 95%, 내년 7월 100%까지 단계적으로 정상화하기로 했다(20일 당국은 LCR 규제 정상화 조치 6개월 유예 발표). 이 조치야말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금융정책의 합작품인 제도적 반달리즘이었다(LCR 규제 발표 이후 4개월간 한국은행은 1.25%p 금리인상).
LCR는 시장성 조달의 차환이 막히는 등 유동성 위기를 대비해 은행이 현금 또는 현금화가 쉬운 자산을 평상시 쌓아 놓게 하자는 제도다. 위기 시 갑자기 신규 자금조달이 막혀 발생할 수 있는 은행의 급작스러운 부도를 막자는 취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원화 자금 융통 어려움 때문에 국내 은행들이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는 모두 원화가 아닌 미국 달러화 조달이 막혀 국가 부도 위험에 직면한 위기다.
은행들에 원화 유동성 위기가 없었던 이유는 시장 조달 의존도가 높은 서구권 은행과 달리 국내 은행들은 전통적으로 예금이 주요 조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이 금융활동에서 저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선 자신의 예금을 맡겨둔 은행에서 뱅크런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같이 예금상품 선호가 높은 국가의 경우, 자국 통화 기준의 엄격한 유동성 규제가 필요한 금융사는 은행이 아닌, 예금기반이 없어 시장서 채권, 기업어음(CP) 등을 발행해 자금조달을 할 수밖에 없는 증권사, 여신전문금융사 같은 비예금 금융사다. 한번 들어오면 잘 나가지 않는 특성이 있는 ‘끈끈한’ 예금과 달리 시장성 자금은 위기가 닥쳤을 땐 쉽게 떠나 버리고 조달금리 변동폭도 크다.
물론 LCR와 순안정자금조달비용(NSFR, 장기유동성) 규제는 우리나라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글로벌 규제다. 하지만 이 규제를 주창한 스위스 바젤위원회(BCBS)는 각 나라의 사정에 맞는 제도 운영을 허용하고 있다. 일률적으로 모든 국가가 100%를 맞추도록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국내 은행에 대해 서구 은행들과 같은 수준으로 자국 통화 기준 LCR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과도한 규제다. 최악의 경우 요즘처럼 제도적 반달리즘이 될 수 있다.
이번 레고랜드 사태를 통해 금융시장이 안정적일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금융정책당국의 심각한 전문성 결핍과 시장 안목 부족이 드러났다. 당국은 매번 대책은 발표하지만 한 단면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단세포적 정책을 위주로 펴왔다. 그 결과, 유연하게 적용해야 할 제도는 과도하고 적극적으로 운영해 시장 혼란을 야기하고, 적극적으로 운영해야 할 제도는 제대로 활용치 않고 방치해 온 것이다.
김선욱 IBA홀딩스 대표, seonwook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