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검은색을 사유하다

입력 2022-10-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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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문학 저술가

동지가 돌아온다. 가을걷이는 진작 다 끝나고, 할 일이 없는 농부의 신발들은 구석에 마른 채로 방치되어 있다. 까마귀떼가 빈들에 내려앉듯 어둠이 내려와 덮는다. 어둠은 온갖 빛을 다 살라먹고 몸피를 키운다. 마침내 밤은 무색의 섬광들로 번쩍인다. 천지간에 가득 찬 음의 기운이 정점을 찍고 양의 기운으로 반전한다. 동양의 오행 철학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한다. 또한 오방색의 하나로 검정은 물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어둠의 검은색은 사방에 물처럼 스민다. 동지는 긴 밤의 원형, 어둠의 계절이 닥친다는 불길한 예고다. 원시인류가 그랬듯이 우리는 존재의 내핍 속에서 겨울을 견뎌야 한다. 어머니가 동생에게 젖몸살을 앓는 젖을 물린 채 재우는 동안 나는 동지 팥죽을 먹고 잠이 들었다.

나는 두 눈으로 어둠을 본다. 실은 눈이 보는 것은 빛의 부재다. 내 눈은 모래로 가득 찬다. 우리는 밤이 오면 모래로 된 눈들을 갖고 야행성 짐승처럼 헤맨다. 검은색은 빛의 부재가 불러온 혼란 그 자체다. 혼란은 질서의 부재, 무질서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난다. 블랙 아웃. 혼돈과 망각. 금지를 금지하고, 불가능을 불가능 속에 머물게 하라! 검은색은 검은 깃발로 나부낀다. 오, 검은색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뛰어나와 검은 깃발을 흔든다.

검은색은 오랫동안 금욕과 근엄함의 정체성이 내재된 색으로 여겨졌다. 한때는 색의 지위를 박탈당했다가 나중에 색의 상징학에서 애도와 우아함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으며 복귀하는 부침을 겪는다. 분명한 것은 검은색이 인류가 창안한 종교와 제의 속에서, 그리고 색의 상징학에서 죽음과 불안에서 욕망과 모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의미를 포괄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검은색의 위상은 누구도 흔들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동지 어둠은 저 너머에서 검은색 동물처럼 온다. 밤은 호랑이 걸음으로 다가온다. 동지가 어둠과 도래할 때 겨울의 기척도 데려온다. 우리는 곧 첫눈과 추운 밤들이 닥칠 것을 안다. 사방이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다. 검은색은 밤과 석탄의 색, 사물과 사물의 차이를 뭉개는 고갈과 부재의 심연, 불가능의 한계의 표상으로 빛난다. 오, 검은색이여, 빛의 부재여! 검은색은 빛의 고갈 속에서 깊이를 얻는 무다. 그리고 우리는 활동하는 무다.

거울 뒤편은 검은색이다. 그게 검은색이 아닐 때 거울은 섬광 더미를 반사하지 못함으로써 제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에 빠진다. 거울은 이면의 검은색이 없으면 빛 반사를 못 한다. 불능에 빠져 아무것도 못 비추는 거울이라니! 거울은 이면의 검은색이 있을 때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거울은 빛의 총아다. 거울은 우리 얼굴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눈가의 잔주름들과 피부의 늘어짐은 나이듦의 증거다. 오늘 아침 나는 좀 더 늙어 보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빛이 조형해낸 시간의 흔적이다. 따라서 거울의 세계는 섬광의 더미가 사라진 부재 속에서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검은색과 대조를 이룬다.

밤은 이성이 잠들면 찾아오는 잠과 몽상의 시간이다. 희미한 반사광 한 점마저도 없는 밤에 돌아갈 곳을 잃은 우리는 자신에게로 귀환한다. 검은색은 빛이 빚은 낮의 자아를 삼키면서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든다. 검은색은 심연이다. 감히 우리는 그 심연을 상상조차 못한다. 검은색은 우리를 이성의 부재로 이끈다. 이성의 부지 속에서는 동물들이 더 우글거리고 더 활동적이다. 동물은 우리보다 더 하염없는 존재들이다, 아울러 동물은 어둠의 덩어리거나 우리의 열등한 형제들이다. 동물들의 눈이 발광체가 되어 빛나는 밤이 온다. 부엉이나 고양잇과 동물들은 밤의 포식자들이다. 이 동물들은 제 뛰어난 시각으로 어둠 속에 움직이는 피식자를 사냥한다. 반면 인간은 어둠 속에서 시각을 잃은 채 헤매기 일쑤다. 밤에 인간의 눈은 거의 쓸모가 없다.

스무 살 때다. 미래 전망의 부재 속에서 나는 암담했다. 내일의 잔혹사가 펼쳐지던 시절이다. 희망 한 점도 품을 수 없던 그 시절엔 모자에 달린 깃털처럼 절망조차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스물아홉에 요절한 젊은 시인은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보겠는가”(기형도, ‘오래된 서적’)라고 노래한다. 검은 페이지로 뒤덮인 영혼이라니! 이 도저한 비관주의의 뿌리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의 영혼을 이토록 어둡게 했을까? 내일, 너머의 내일, 또 그 너머의 내일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자는 절망하는 법이다. 나에게 한낮은 부끄러움의 시간이었다. 밤에만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침이 밝아오면 밤을 불사르며 쓴 글들을 태웠다. 불타고 남은 재는 무다. 그것은 내 안의 들끓는 부끄러움이 만든 의식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검은색이 준 시련들로 내가 단련되었다는 점이다.

▲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겨울밤 수억 광년 떨어진 자리에서 별들이 반짝거린다. 검은색은 흰눈과 속눈썹의 뒤섞임. 까마귀의 색, 암실의 색, 블랙홀과 암흑물질의 색. 검은색은 색들 중에서 가장 열등한 색인가? 아니다. 검은색은 모든 색들의 어머니, 색의 원초적 거점이다. 옛날의 잉크가 다 검은색이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 펜촉에 검은 잉크를 찍어 글씨를 썼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썼듯이 “백색이 지키는 비어 있는 종이”에 검은색 깃털을 가진 새들이 내려앉는다. 내가 쓴 것은 검은색의 상형문자들. 백지에 남긴 내 몽상의 흔적들. 검은 잉크로 쓴 글씨들은 죽음을 물고 나오는 빛의 파편이다. 글씨들은 함성이 없는 외침이고, 침묵의 언어들이다. 내가 잠든 동안 글씨들은 밤새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밤은 우리 인생의 반을 빚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낮보다 밤을 더 선호한다. 어둠에 친화적이라고 해서 그들을 비사교적인 은둔자라고 비난하지는 말라. 낮을 노동과 업무로 쓰는 사람과는 달리 밤의 정적 속에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예술가들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낮보다 더 밤을 선호하는 게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들은 분명 밤의 메마름 속에서 바위를 쪼갤 듯 울어대는 매미처럼 일하며 더 창조적 성과를 낸다.

검은색은 거의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죽음과 연관되는 상징색이다. 죽음은 단독자의 소멸, 희망의 탕진, 무조건적인 투항, 다시 돌아올 길 없는 레떼 강을 건너는 일이다. 어제 걷고 말하던 자는 오늘 돌연 현존의 자리를 비우고 떠난다. 우리는 장례식에 갈 때 남자건 여자건 검은 예복을 차려 입는다. 여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쓴다. 남자는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구두를 신는다. 왜 우리는 망자를 위하여 검은색 옷을 입는가? 검은색은 금욕의 표상이다. “망자와 관련하여, 애도의 검은색은 모든 인간적 과시의 불꽃을 꺼 버리는 소멸이다. 모든 몸은 빛의 부정과의 동등함에 내맡겨진다. 즉 그가 타자보다 더 빛을 발하는 것은 금지된다.”(알랭 바디우, ‘검은색’ 박성훈 옮김, 민음사, 86쪽) 검은색은 망자를 떠나보내며 그에 대한 애도를 담기에 맞춤한 색이다.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 속에 가둔다는 점에서 죽음이란 인대가 끊어진 발목이다. 더는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탕 탕 탕. 우리는 검은색의 저격에 일제히 쓰러진다. 알랭 바디우는 검은색이 색채의 무라고 말한다. 색채의 순수한 결여이고 무 그 자체! 검은색은 아무것도 없음, 그 바탕에서 죽음을 뒤집어쓰고 다시 부활한다.

밤이 온다.

밤의 검은 휘장 안에서 우리는 궁핍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검은색이 자양분으로 당신의 영혼을 풍요하게 하리라.

그러니 조용히 머리를 수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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