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에린의 글로벌 혁신] 비전과 공유가치의 ‘커뮤니티 빌딩’

입력 2022-12-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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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스쿨 학장, 파슨스디자인스쿨 경영학과 종신교수

필자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5년여간 진행해 온 칼럼 집필을 접는다. 더욱 바빠지는 상황이 되기도 하였지만, 긴 기간 써왔고 이쯤 다른 참신한 주제로 글을 써 주실 분에게 넘기는 것이 좋겠다 생각해 내린 결정이다. 기고를 마치며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칼럼 내용이 기업과 마켓, 혁신에 관한 것이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인생 커리어를 돌아보는 계기로 이어졌다. 누구에게 영감을 줄 만큼 그리 독특하고 특별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또 어느 면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은 듯도 하여, 미래를 계획하는 젊은이에게, 혹은 나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을 에필로그로 적어 보고자 한다.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항상 후회되는 일이 먼저 떠오르는 듯하다. 나의 가장 큰 후회를 꼽자면 “삶의 시간이 지나간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뼈저리게 이해하지 못한 점이다. 배움에 대한 능력도 훨씬 충만하고 체력도 좋은 젊은 시절에, 치열함이 요구하는 성실함도 고통도 감내하기 싫었다. 항상 “이만하면 됐지”라는 생각이 머리 뒤편에 있었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내 삶의 유한(有限: finite)함에 대한 자각(自覺)과 내 시간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서였던 것도 같다. 엉덩이가 타듯이 살아도 설렁설렁 살아도 인생은 어찌 가도 간다는 것을, 노력의 뒤에 어떤 모양이든 항상 대가가 있다는 것을 진즉 알았으면 나태함을 이겨낼 수 있었을 듯하다. 이제 사회 첫발을 내딛는 내 아들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내가 커온 세대가 성장하며 그리 강조하지 않았던 ‘생각의 자유로움’과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파슨스 디자인 대학에서 흔치 않은 종신 정교수이며, 100년이 넘는 학교 역사상 최초의 동양 여성으로서 학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 위치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는 ‘지금 하고 있는 연구분야(전략 디자인 경영)를 어찌 알고 시작했나’이며, 둘째는 ‘이민자가 미국 주류 사회에서 리더가 되려면 어찌해야 하나’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호기심일 수 있겠다. 필자가 유학을 나왔던 1990년대 초, 학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본인이 학부에서 했던 공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절대 금기였다. 필자는 35년 전 대학시절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석사학위로는 컴퓨터로 패턴 전환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박사는 경영과 소비자 전공 쪽이었다. 다정하셨던, 지금은 돌아가신 지도교수님께서, 이런 식으로는 졸업하고 자리를 못 잡을 거라 걱정해 주셨던 기억이 아련하다. 하지만 나는 졸업 후 자리보다 다른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세상이 변하여 같은 우물을 파는 사람도 존경받지만 융합적인 접근방법으로 연구와 교육을 해나갈 사람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오고, 필자처럼 학계에서 금기시되던 여러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었다. 그래서 현재 세상이 해야 한다는 무엇에 너무 큰 가치를 두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정해진 목표를 위해 한 길을 가는 것도 훌륭하지만 본인이 끌리는 것, 좋아하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다만 이런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항상 생각하며 ‘연결의 끈’을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두 번째 질문은 사실 좀 더 대답하기가 어렵다. 난 미국에서 커리어를 이루어 가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경영대에서 강의할 때도 그랬지만, 디자인 학교로 와서도 교수들은 대부분 백인 남성들이었고, 너무도 잘난 몇몇 백인 여성들이 실세였다. 긴 기간을 유일한 동양인 여성 교수로 지냈다. 내가 이민자라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언어의 문제라기보다는 교류와 소통 문화를 이해 못 해 크고 작은 실수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특별히 쌀쌀맞은 뉴욕 주류 사회의 리더로서의 나를 그리기는커녕, 종종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비슷한 위치에서 이런 마음으로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나의 관점을 전환시킨 것은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개인의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미국은 개인 한 사람을 한없이 작게 만들 수 있는 사회다. 내가 뼈져리게 느낀 것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뮤니티 빌딩(community building)을 위해 노력했다. 이 노력의 핵심은 구성원이 진심으로 중요히 생각하는 ‘비전’과 ‘공유 가치’로 커뮤니티를 꾸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꼭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진심으로 느끼고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조직 가치를 밀었다. 이러면서 나를 믿는 교수들이 한둘 생기고, 자신감과 리더십의 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나도 모르게 세상이 변해, 내가 커뮤니티를 통해 고무하였던 가치들이 사회 변화와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오게 되었고, 리더로서 나의 단단한 위상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필자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오랜 기간 몸담았던 파슨스를 떠나 2023년부터 홍콩 이공대학교에서 석좌교수(Endowed Professor)와 최고위 학장(Executive Dean) 직을 맡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들도 많았다. 사실 문화적 지형적으로 낯선 곳에서 책임 있는 자리를 맡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한 이유도 위의 두 가지에 담겨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새로운 시장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의 기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중요시하는 교육과 사회 기여의 가치로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기회가 더 큰 스케일과 임팩트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 내 경험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에 어려움은 있겠으나, 나를 끌어왔던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내가 후회했던 점을 깊이 상기하며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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