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신뢰’라는 산타를 기다리며

입력 2022-12-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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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산타가 돌아온다는 믿음에 있었다. 채권시장도 마찬가지다. 만기가 도래하면 원금과 함께 사전에 확정된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기에 채권시장은 유동성을 확보하고 작동할 수 있다. 기업들은 신뢰를 기반으로 회사채를 발행하고 투자자들은 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금을 투자한다.

올 하반기 신뢰가 실종된 채권시장은 그야말로 먹통이 됐다. 시장참가자들 사이에는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대신 불신, 기대감보다 불안이 자리했고, 하나둘씩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강원도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가 촉발한 ‘신뢰도 위기’는 빠르게 주변 자금시장의 위기로 퍼져나갔다. 중앙정부와 같은 최고 수준 신용도를 보유한 지방정부의 신뢰가 흔들리면서 모든 종류의 채권 수요가 말라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AAA급 우량 채권에서도 미매각이 속출하고, CP금리는 49일 연속 연고점을 경신하며 치솟았다. 자금 확보에 비상이 걸린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발행이 손쉬운 단기자금시장으로 몰려가면서 일부 프로젝트파이낸싱(PF) ABCP는 연 20%에 거래되기도 했다. 정부가 부랴부랴 시장 안정 대책을 꺼내 들었지만, 이미 시장의 신뢰는 무너지고 난 뒤였다. 유동성 위기 때문에 ‘기업부도’가 나올 수 있다는 공포가 커지는데도 금융당국의 대응 속도는 더뎠고, 시장 혼란이 커질 때까지 뚜렷한 대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자금시장 경색은 올해 초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가속화되면서부터 줄곧 제기되어 온 문제다. 신용평가사들은 저금리 환경에서 활성화된 부동산 PF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일찍부터 보내왔지만, 정부는 ‘모니터링 강화’와 같은 상투적 대응만 반복할 뿐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않았다. ‘늦장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정부가 뒤늦게 투입을 약속한 50조 원 규모는 2020년 코로나19 당시 투입한 ‘40조 원’보다도 큰 액수다. 이번 자금 시장 마비가 팬데믹 상황만큼이나 심각했다는 의미다.

유동성 지원 대책이 효과를 내면서 분위기는 다소 진정됐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채권시장에는 내년 상반기에만 약 50조 원 규모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한전채 발행 한도를 늘리는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국채와 동일한 신용도를 지닌 한전채가 시장에 대거 풀리면 다시 자금 블랙홀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금융정책의 일관성과 믿음에 기반한다. 신뢰는 금융시장의 근간이다. 시장이 신뢰를 잃으면 구두개입 또는 정책 시그널이라는 수단을 운용하기 힘들어진다. 정부는 새해에도 금융시장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시장의 신뢰를 쌓아나갈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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