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동생분을 민 행동은 나쁘죠.”
폭력은 그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무조건 나쁘다. 하지만 행위와 별개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유와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고아가 아닌데 고아처럼 컸단다. 부모님은 책임감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자를, 어머니는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텅 빈 집에서 여동생을 껴안고 스스로 커야만 했다.
다섯 살 무렵에 집 안에서 밤늦도록 켜져 있는 불을 다 끄고 다녔다. 실제로 그랬단다. 그리고 비 오는 날 거리에서 떨고 있는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 왔다가 엄청나게 혼났다고 한다. 강아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애견인(?)이 되었단다.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니, 전혀 다르게 보였다. 책임감! 힘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는 무책임했던 부모님을 대신할 만큼 책임감이 있었다.
작은 단서를 모아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처럼, 우리는 그의 삶을 역추적했다. 다섯 살 유아가 왜 불을 끄고 다녔을까? 책임감 때문에. 비 오는 날 그는 무엇을 데려왔을까? 강아지가 아니라, 돌봄을 받지 못한 또 다른 자신을 데려왔다.
여동생은 왜 밀었을까? 여동생이 파산했을 때 빚을 청산해 준 오빠다. 여동생이 규칙적으로 생활해서 직장 생활을 잘 하도록, 굳이 신혼집으로 오게 한 오빠다. 건강하게 살길 바라면서 잔소리하다가 싸웠고, 몸싸움도 하게 됐다.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대단히 낯선 시선으로 자기를 돌아봤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고 했다. 한편으론 고집 세고 폭력적인 오빠였지만,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지만, 분명 여동생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도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
이후 상담 과정은 생략한다.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자 그는 눈부시게 바뀌어 과거를 논하는 일이 무의미해졌다. 마지막 시간에 아내 손을 잡고 울면서 그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다르게 바라보니, 다르게 살게 되었네요.”
가족을 족쇄처럼 느끼는 사람은 무조건 가족을 나쁘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나쁘기만 한 가족은 없다. 그리고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걷는 존재다. 다르게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바뀔 수 있는 존재다.
(※위 사례는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각색한 내용입니다.)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장·임상사회사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