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두려움 없는 늦깎이

입력 2023-02-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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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수 브라운백 대표

로저 페더러는 10대에 들어서야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는 스키, 레슬링, 수영, 스케이트보드, 야구, 핸드볼, 테니스, 탁구 등을 아주 어릴 때부터 경험했지만 제대로 운동을 한 것은 또래 선수보다 한참 늦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 세계 입문 후 어릴 때부터 테니스에 올인했던 많은 선수들을 꺾으며 테니스의 황제로 시대를 풍미한다. 반면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는 우즈를 다르게 키웠다. 우즈는 생후 6개월부터 훈련받았으며, 네 살 때부터 아침 9시부터 매일 8시간 이상 훈련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세계적인 골퍼가 되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전설이 되었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의 저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페더러를 ‘늦깎이’의 대표 사례로 언급하며 빠른 출발보다 다양한 탐색을 성공에 이르는 가장 큰 비결로 꼽는다. 어린 시절에 반드시 성과를 이뤄야 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경우 오히려 자신의 재능과 관심을 발견해내는 탐색의 기회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직업 세계의 변화를 관찰하면 이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오늘날 각종 직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강요받는다. 1960년대 인기 직종 1위는 택시운전사였지만, 2000년대 인기 직업 1위는 공인회계사였다. 두 직업 모두 현재도 존재하지만, 그 위상은 이제 과거와 너무나 다르다. 택시운전사는 인기가 떨어졌을뿐더러 자율주행차의 시대를 예감하게 되었고, 공인회계사는 대표적인 인공지능 대체 직종으로 꼽히기까지 한다.

트렌디한 직업의 경우에도 긴장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 검색 광고를 하다가 어느새 큰 매체 예산 점유율을 차지한 페이스북 광고를 해야 했던 퍼포먼스 마케터는 이제 개인정보를 활용하지 못하는 페이스북 이후 단계를 준비하지 못하면 그 사이 눈부시게 발전한 플랫폼에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 디자이너는 다양한 템플릿과 자동화로 무장한 시각화 도구에 맞서 창의성과 생산성을 증명해야 한다. 과거에 없던 직종으로,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데이터 분석가는 어느새 인공지능에 대한 활용과 비교의 경계에 서 있다.

특정 직군이나 직업으로 진로의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 목적인 조기교육은 오늘날로 보면 이른바 ‘대치 키즈’와도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유아기부터 공적 교육기관 대신 제한된 입학 기회의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10대 내내 학원과 과외 뺑뺑이를 돌며 명문대 입학의 과업을 향해 집중한다. 하지만 대학이 인생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1985년 국내 입학 선호 1위는 법학/물리학이었고, 그 뒤 의예과의 시대가 거의 30년간 이어졌는데, 2019년 기준 수위는 경쟁률 99:1을 보이는 연기학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그리고 미디어 산업으로 국내 산업의 메가트렌드가 변경된 것을 엿볼 수 있게 하기도 하지만, 획일화를 넘어 개성과 다양성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의 주소를 알려준다는 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과거 스스로를 감추고 산업사회의 역군이 되기를 희망하던 시대, 개인의 입신양명을 공격적으로 추구하던 시대가 이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어쩌면 늦깎이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배운 우리나라에는 이제야 균형을 위한 단계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업의 영역에서도 브라운백의 오피스 커피 서비스인 ‘블리스’는 구독 사업이 가진 축적의 특성이 나와 혹은 브라운백 멤버와 잘 맞았다는 측면에서 돋보였다. 우리가 구성했던 서비스는 매우 복잡해서 매달 원두가 배송되어야 했고, 커피머신이 주기적으로 모니터링되고 관리되어야 했으며, 추가로 요청되는 고객의 요구에 늘 대응해야 하는 고도의 오퍼레이션이 필요했다. 실제로 구독 사업을 수행했던 나이키, 카카오 등 세계적인 회사들도 모두 연 60% 이상의 높은 해지율이라는 쓴맛을 보고 철수했지만, 우리는 연평균 고객 유지율 99%(해지율 1%)라는 기적의 수치로 3000여 개 기업의 커피를 책임지는 회사가 되며 고객 가치의 만족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민첩하고 트렌디하게 수행하기보다는 우직하고 단단하게 하나씩 다져가는 업의 본질이 브라운백과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늦깎이였다. 창업 경험에 비해 기관 투자를 받는 벤처 기업 형태의 사업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구축했고, 주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미디어커머스로, 라이브커머스로 빠르게 이동할 때 전통 산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기술보다는 예술에, 유행보다는 관성에 익숙했기 때문에 산업의 크기 대비 혁신이 늦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강점이 되었다. 우리의 디지털 마케팅은 미디어커머스 회사보다 다소 덜 뾰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커피 산업에서는 최첨단이었다. 우리의 고객관계관리(CRM)는 선진 B2B 회사에는 우스운 수준일 수 있었지만, 주 경쟁사가 기존의 자판기 영업 일색인 환경에서는 매우 유리했다. 친절한 서비스와 체계적인 시스템을 고민하는 사업자는 만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는 사업 진출도 늦었다. 경쟁사는 2016년부터 커피머신 렌털사업을 시작했었지만, 우리는 2019년에야 걸음마를 뗐다. 우리가 늦깎이로 한 시행착오는 정말 다시 돌이켜봐도 아찔한 수준이었다. 카페 수준의 커피를 사무실 환경에서 제공하기 위해서, 리모트 워크 시대에 맞는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다듬어갔다. 인터뷰도 설문조사도 고객 탐방도 서슴지 않으며 지금도 계속 완성도를 축적하고 있다. 모든 것이 탐색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꾸준히 브라운백답게 쌓아나가자, 비로소 1년 6개월 만에 시장의 1위가 되었고 지금은 격차가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내 편에 서게 할 수 있는 큰 기회는 결국 ‘나다움’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찾고, 인생의 굴곡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연결과 확장으로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변화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임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다시 외부 예측이 아닌 내면의 탐색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지만 단순하다. ‘우리의 강점은 무엇인가?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 즐겁고 행복한가?’ 등의 질문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늦깎이가 아니다. 다만 나다운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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