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29. 미국과 ‘유럽’의 친환경산업 보조금 전쟁

입력 2023-02-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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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IRA 제정 6개월…EU ‘유럽주권펀드’ 신설 밝히며 정면 대응

“유럽은 청정기술 혁명을 선도하고자 한다.”

유럽연합(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발언이다. 1일 기자회견에서 EU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맞대응책을 공식 발표했다. 미국과 EU 간의 친환경산업 보조금 전쟁이 시작됐다. 세계경제 총생산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미국과 ‘유럽’의 청정기술 지원 경쟁은 국제사회가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데 긍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보호무역의 성격이 있어서 무역만이 살길인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이 만만치 않다.

환경산업 세제 혜택·보조금 규정 완화

지난해 8월 미국은 IRA를 제정했다. 이 법은 에너지 안보와 기후위기 대응 강화가 목표여서 자국의 친환경산업 보호와 육성이 우선이다. 우리 돈으로 500조 원을 쏟아붓는다. 내용을 보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자동차, 그리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의 부품을 사용한 전기배터리만을 지원한다. EU는 이 법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원산지 조항을 위반한 자국 산업 보호정책이라며 미국을 설득하는 데 몇 달을 허송했다. 결국 EU도 친환경산업 대규모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EU판 IRA는 크게 기존 정책을 확대하는 것과 신설하는 두 개로 구분된다.

EU는 27개 회원국 간에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이고 자본과 사람도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이다. EU는 엄격한 국가보조금 규정을 운영해왔다. 부실기업을 지원하려 해도 구조조정의 목적에만 한정되었고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단일시장이 왜곡되지 않기 때문이다. EU는 이제 이런 국가보조금 규정을 완화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로 EU와 미국이 부과한 경제제재의 영향을 받은 농업과 어업의 경우 각각 25만, 30만 유로까지 승인이 필요 없다. 녹색수소와 같은 대규모 투자는 투자 시기가 중요하다. 보통 2년 넘게 걸리는 국가보조금 승인 시간을 대폭 줄이고 그 절차도 간소화한다. EU는 팬데믹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2020년 말 8000억 유로(약 1100조 원)의 경제회생기금(ERF)에 합의하고 실행 중이다. ERF 가운데 37%가 녹색전환에 지출되는데 이 비중을 더 높인다. 회원국들이 공감하고 있기에 조만간 합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번에 신설되는 프로그램이다. 집행위원회는 유럽주권펀드(European Sovereignty Fund, ESF)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이 펀드는 청정기술 기초 연구 및 혁신/전략적 산업 프로젝트에 지원된다. ‘유럽’이 중국이나 미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주권, 전략적 자율성을 지키겠다는 의미에서 주권펀드로 이름 붙였다. 올해 안에 설립을 목표로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금 규모와 조달 방식은 논란이 클 것으로 보인다. 1일 기자회견에서도 기자들이 이 점을 집중 질의했지만,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명확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보조금 관련 ‘주권펀드’ EU 내 논란

9일부터 이틀간 EU 정상회의인 유럽이사회가 브뤼셀에서 열린다. 27개 회원국 수반들은 유럽판 IRA를 논의해 큰 틀의 합의를 이루려 할 것이다. 그러나 회원국 간 입장 차이가 크다.

스웨덴은 올해 상반기 EU의 순회의장국이다. 네덜란드와 함께 EU 회원국 가운데 대표적인 자유무역 지지 국가다. 이들은 청정기술 개발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국가보조금 규정의 완화는 원칙상 동의하지만 큰 틀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프랑스는 대척점에 서 있다. 각종 경제정책에 국가개입주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미국이 IRA를 제정한 후부터 ‘메이드 인 유럽’ 전략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이렇기에 프랑스는 국가보조금의 대폭적인 규정 완화를 원한다. 독일은 프랑스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

주권펀드의 자금조달방식은 회원국 간의 입장 차이가 가장 크다. 이탈리아는 경제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국가보조금 규정을 완화하면 EU 차원의 추가적인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해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6720억 유로의 국가보조금 가운데 53%, 3560억 유로를 독일이 자국 기업을 지원했는데 이는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9% 규모다. 반면 이탈리아는 GDP의 3% 정도의 국가보조금만 지급했다. 이탈리아는 국가보조금 규정을 완화하면 재정 여력이 있는 독일 같은 회원국에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유럽주권펀드를 만들고 국제자금시장에서 EU가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을 주장한다.

그러나 독일은 자국에 큰 경제적 부담이 되는 이런 자금조달 방식을 반대한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은 1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은 기존의 EU 예산을 충분히 활용하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며 ESF 신설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독일이 주권펀드의 신설조차 반대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펀드의 자금조달 방식은 이견이 커서 앞으로 질긴 협상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날로 거세지는 청정기술 혁신 경쟁

2017년부터 4년간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때 미국은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며 보호무역에 열중했다. 만약 당시에 EU마저 보호무역으로 돌아섰다면 현재 세계는 훨씬 더 보호무역 흐름이 강해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EU는 자유무역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왔다. 미국의 IRA에 대해서도 EU는 무역기술위원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미국이 반대해 결국 유럽도 보조금 전쟁에 합류했다. 2021년 중반에 설립된 무역기술위원회는 미국과 EU의 통상과 경쟁정책 장관들의 고위급 회담이다. 기술표준과 안전한 공급망 확보, 민간과 군에 사용되는 반도체 칩 같은 핵심 부품의 수출 통제 등도 논의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2020년 말 WTO 항소심 패널을 임명하지 않아 세계무역기구의 이 기능이 정지됐다. 따라서 EU는 WTO에 IRA를 제소해봤자 실익이 없기에 유럽판 IRA를 결정했다. 이런 흐름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과 EU가 청정기술의 보조금 전쟁에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지 않게 긴밀하게 상호 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재생에너지 투자는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했다(위 그래프 참조). 2018년 3500억 달러의 재생에너지 투자가 있었는데 지난해는 4700억 달러로 34.2%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에너지 효율(연비) 제고 기술 투자도 1000억 달러 늘었지만, 원자력 투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원자력을 청정에너지로 판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시절 보호무역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북미 지역의 벤처기업들은 청정기술 투자를 늘려 왔다. 바이든 행정부 집권 1년 차인 2021년에 450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아래 그래프 참조). 이제 IRA 시행으로 이 투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벤처가 청정기술에 자금을 조달한 액수는 같은 기간에 100억 달러로 미국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은 재생에너지 비중 축소 ‘역주행’

지난해 국내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는 삼성전자가 일 년에 사용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원래의 30%에서 21.6%로 낮춘다고 확정했다. 애플과 구글 등 굴지의 세계적 기업들은 2030년까지 생산과정에 사용되는 전기를 모두 재생에너지로 쓰겠다는 RE100에 가입해 실천 중이다. 영국의 민간단체 RE100 대표는 지난해 11월 말 윤 대통령에게 “재생에너지 확충에 역주행하고 있다”며 “이는 한국의 경제 잠재력을 저해할 것이다”라는 항의서한을 보냈다. 국책연구기관 한국개발연구원(KDI)도 RE100이 세계적인 추세이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앞으로 우리 기업들의 수출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EU의 청정기술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재생에너지 확충이 세계적 흐름인데 우리는 역행 중이다. 다음 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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