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에이즈 걸린 변호사가 법을 사랑한 이유

입력 2023-03-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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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주 사회경제부 기자
▲송석주 사회경제부 기자

법원 출입 기자가 되고 가장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판결문을 읽고 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판결문이란 판사가 판결을 내린 사실과 이유, 결론에 해당하는 주문(主文) 등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거기에는 난해한 법률 용어는 물론이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넘쳐나 읽는 이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가령 ‘법인격의 형해화’나 ‘형벌의 개별화’와 같은 용어는 어려움을 넘어 묘한 놀라움을 자아낸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진 편이다. 과거의 판결문은 한 문장이 거의 한 문단에 육박했고,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있어 기초적인 한자어를 모르면 독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판결문을 기사화하는 게 힘들어서 푸념할 생각이었는데, 선배들의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그 시절에 태어나 기자를 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판결문이 지루한 글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지난달 21일 법원이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이는 지난해 1월, 1심 재판부가 이성과 동성의 결합을 구분하는 게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사회보장 차원에서 보호 대상이 되어야 할 ‘생활 공동체’ 개념이 기존의 ‘가족’ 개념과 달라지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성 커플이더라도 ‘실질적 사실혼 관계’에 있다면,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다.

해당 판결문을 입수해 찬찬히 읽다가 한 대목에서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판결문 끝에 재판부는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며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고 적었다.

가끔 사건이 아닌 사람이 담긴 판결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인간의 마음을 곡진히 흔드는 짧은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물론 법리를 근간으로 하는 판결문과 문학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법이나 문학이나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고, 그것들은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들의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에이즈에 걸린 게이 변호사 앤드류(톰 행크스)가 법학 도서관에서 에이즈 관련 서적을 찾자 사서는 책을 건네며 “개인실도 있습니다만”이라고 덧붙인다. 앤드류가 “괜찮아요”라고 답하자 사서는 “개인실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라고 되묻는다. 이 순간 카메라는 앤드류를 불편하게 느끼는 주변인들의 표정을 포착한다. 사서의 우회적 강요와 주변의 암묵적 혐오에 앤드류는 “나는 괜찮은데, 당신이 불편한가요?”라고 맞받아친다.

이번 판결이 많은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살아갈 희망을 주었다. 당신의 불편함이 나의 희망이 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판결문의 문구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법이 사회적 소수자의 삶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었기 때문이다.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해고된 앤드류는 법정에서 “왜 법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따금,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정의를 구현하는 데 동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럴 때 정말 전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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