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30. ‘유럽’의 문화정책과 우리의 경우

입력 2023-03-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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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없는 유럽” 위해 경제서 시작 정치공동체 꿈꿨지만, 진정한 통합의 고리는 ‘문화 정체성’

“유럽통합을 다시 시작한다면 문화에서 시작하겠다.”

유럽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장 모네가 자서전에서 한 말이다.

20세기 전반기에 양차 대전의 비극을 겪은 유럽. 전쟁의 필수물자인 석탄과 철강부터 유럽 차원의 기구가 공동으로 관리해야 전쟁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다. 독일의 루르 지방에 풍부한 석탄과 철강을 독일이 아니라 유럽의 기구가 제어한다. 1952년부터 운영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모네의 아이디어였다. 기간산업인 석탄과 철강을 국가가 아니라 유럽 기구가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경제의 다른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석탄과 철강에서 시작된 유럽통합이 다른 분야로도 확산돼 1990년대 중반부터 유럽연합(EU) 회원국 간에는 단일시장이 이뤄졌다. 비정치 분야의 협력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되면 정치 분야로도 통합이 파급될 수 있다는 게 장 모네의 생각이었다. 흔히 기능주의적 접근이라 불린다. 그럼에도 모네는 유럽통합을 더 굳건하게 끌고 나가려면 유럽의 정체성 형성이 꼭 필요하고 문화가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문화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 그리고 기독교 등 공통분모

우리가 흔히‘ 유럽’이라고 말할 때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여러 나라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변방으로 전락했다. 미·소 초강대국이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를 양분했고 유럽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무대에서 유럽의 발언권을 찾아 목소리를 내려면 하나의 블록, 통합이 필요했다. 2차대전 직후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체험한 지식인들은, 유럽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기독교를 공유한다며, 이런 공통의식을 바탕으로 통합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주창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가보면 중앙역과 성당, 시청, 시장 등으로 구성된 구도심(구심)을 만난다. 보통 돌로 된 몇백 년 된 길, 걸어서 차근차근 구경할 수 있다. 영국은 이제 EU의 회원국이 아니다. 영국이 EU회원국이었을 때 영국의 어느 정치인은 미국보다 유럽대륙의 나라를 방문하면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국과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만 미국의 도심 구성이 유럽과 매우 다르기에 전통을 온전히 담고 있는 유럽의 도시가 더 친근하고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 유럽은 수십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지만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며 이런 게 건물이나 유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유럽 차원의 문화정책은 1985년에야 시작됐다.

그리스 국민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유럽 문화수도’ 제안이 시작

‘일요일은 참으세요’는 1960년에 개봉된 그리스 영화다. 당시 40살의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가 주인공 일리야로 나와 미국인 학자 호머와 티격태격하며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로 메르쿠리는 그해 칸영화제에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와 뮤지컬을 통해 그리스 국민 여배우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배우 활동에서만 그친 게 아니었다. 1967년 그리스에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집권하자 그는 외국에서 군부에 항거했다. 군부가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자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났고 그리스인으로 죽을 것이다. 군부는 파시스트로 태어났고 파시스트로 죽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74년 쿠데타 정부 몰락 후 그는 그리스사회당 설립에 참여해 창당 회원이 됐다.

메르쿠리는 1981년부터 9년간 그리스 사회당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1983년 상반기 그리스가 유럽경제공동체 순회의장국이었을 때 그는 당시 9개 회원국의 문화장관을 초청해 유럽 차원의 문화정책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회원국 문화장관이 모임을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경제 중심으로 통합이 이뤄져왔는데 유럽 공통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의 참여와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문화정책이 필수임을 설득했다. 회원국의 공감을 얻어 나온 게 ‘유럽의 문화수도’다. 이 프로그램이 첫 시행된 1985년에 그리스 아테네가 유럽의 문화수도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확대 개편돼 2001년부터 1년에 두 개 도시가 선정된다. 최소 7~8년 전에 문화수도 선정에 응모한다. 지원 도시가 유럽의 문화를 대표하는지의 근거와 유럽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 지원서를 제출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5년 전에 미리 선정된 유럽의 문화수도 도시들은 EU의 지원 예산을 받고 차분하게 준비를 한다.

▲올해 2월 4일 그리스 아테네 서쪽의 엘레프시나 마을에서 열린 유럽 문화수도 선포식 공연 모습. 2023년 유럽 문화수도에는 그리스의 엘레프시나, 루마니아의 티미소아라, 헝가리의 베스프렘이 선정됐다.  AP연합뉴스
▲올해 2월 4일 그리스 아테네 서쪽의 엘레프시나 마을에서 열린 유럽 문화수도 선포식 공연 모습. 2023년 유럽 문화수도에는 그리스의 엘레프시나, 루마니아의 티미소아라, 헝가리의 베스프렘이 선정됐다. AP연합뉴스

유럽 정체성 형성 위해 공통의 문화·역사 공유 노력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가 문화부 장관이 되어 야심차게 이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런 리더십이 뒷받침되고서야 유럽 차원의 문화정책이 시작될 수 있었다. 독일의 베를린과 바이마르, 이탈리아 피렌체, 스웨덴 스톡홀름, 프랑스 파리, 포르투갈 리스본, 체코의 프라하, 비틀스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 등 유럽의 유명 도시들이 문화수도 타이틀을 안았다. 한 번 선정된 도시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려 마케팅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유럽의 문화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의 경우 방문객이 늘어나고 문화재 보수 등에도 더 관심을 기울여 시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EU의 문화정책은 회원국이 시행 중인 문화정책을 보완하지 대체하지 않는다. 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되게 유럽 공통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공유하려 한다. EU의 문화정책 가운데 유럽의 문화수도가 가장 잘 알려진 프로그램이다. 이외에 EU의 문화정책은 27개 회원국의 창조산업을 지원한다. 최소 3개 회원국 이상에서 지원할 경우 예술가들의 교류와 창작 활동도 지원한다. 영화인과 출판사 및 번역 사업도 지원하며 해마다 EU 문학상도 선정 발표한다. EU 전체 예산 가운데 교육과 문화 예산을 합하면 4% 남짓이다. 하지만 국가 중심의 문화정책을 유럽 차원에서 보완해 정체성 형성에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운영과 올해 시작되는 문화도시 사업

올해 우리 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에서 ‘문화도시’ 지정사업이 나왔다. 올해 7개 도시가 지정되며 선정된 지자체에 5년간 최대 100억 원의 국고가 지원된다. 지역 균형발전에 문화예술이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정부의 관련 업무가 계승 발전된다. 문화도시 명칭을 얻으려는 각 지자체 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광주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원래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으로 제시됐다가 이후 정부에서도 사업이 지속돼 2015년 문을 열었다. 아시아 각국의 문화 교류와 창작 활동을 지원한다. 이 사업은 문화도시보다 훨씬 먼저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자원을 분산하려고 시작됐다. 5·18 민주화운동의 주요 사적이자 상징인 옛 전남도청 건물을 보존한다는 취지도 담겨 있다.

영화 ‘기생충’이 우리 영화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어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오징어 게임’, ‘지옥’ 등 한국의 콘텐츠가 수시로 세계무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는 흔히 부드러운 힘(소프트파워)이라 불린다. 강압적이 아니라 스스로 끌어당겨 오랫동안 그 힘을 발휘한다. 문화도시와 아시아문화전당이 나라 안에서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한류를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물론 일회성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업의 지속도 중요하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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