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언어의 감옥

입력 2023-03-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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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연세대학교 명지병원 외래교수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잠이 깼어요.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때 ‘4:44’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4 시 44분이었던 거예요. 잠이 확 달아났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4란 숫자를 보게 되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고, 그런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서 숫자 7을 77번 속으로 되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몇 달간 ‘4의 테러(?)’로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외래에 내원하였다. 대학교 3학년인데, 이 때문에 중간고사도 망쳤다고 하였다.

“정말 끔찍했겠군요. 숫자는 0에서 9까지 열 종류밖에 안 되니, 매일 4의 대공습을 받았어야겠네요.”

“네, 정말 하루하루 견디기가….”

“자, 이제 제가 하는 말을 따라 해 볼까요?”

“죽을 4!”

“네?”

“따라 하세요.”

“죽을 4”, “죽을 4”, “죽을 4”….

30여 분간 서로 번갈아 그 단어를 주고받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그를 몇 달간 짓누르고 있었던 ‘4의 대공습’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느 날 같은 실습조 A와 말다툼을 하였는데, 잠시 나쁜 맘을 먹었기 때문에 A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까 죄책감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행동을 열 번 반복해야만 했는데, 계속해서 A에 관한 분노가 들어서 그날 그 행동을 수십 번 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를 따라 해 보세요. A는 오늘 밤 자정에 나의 저주로 심장마비로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 문장을 여러 번 따라 하게 한 후, 다음 날 다시 내원하였을 때 A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편안해졌다고 하였다.

인간은 언어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인해 문명의 발달을 이루는 혜택도 입었으나, 또한 자신이 만든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마는 형벌도 같이 겪게 되었다. 그래서, 심한 경우 ‘강박장애’라는 질환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위와 같이 ‘언어는 언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는 치료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진료를 마친 후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다. 그 맛과 향을 있는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해 본다. 언어가 포함된 느낌을 배제하면서.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 비트겐슈타인

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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