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프리즘] 대통령과 재계의 동반외교

입력 2023-03-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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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필자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신입사원이던 1981년 초, 당시 국제 담당 이상운 상무가 나를 불렀다. 퇴근길이었다. “내일 오후 청와대의 최창윤 정무비서관이 만나자고 하니 참고할 거리가 있으면 정리해 달라”고 했다. 퍼뜩 며칠 전 발표된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안 5개국 순방이 떠올랐다. 동시에 얼마 전 한국에 들렀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대한 경제사절단(Presidential Economic Mission to Korea)이 오버랩됐다. 당시 리처드 알렌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단장이 되어 방한한 민간사절단에 대통령의 직함이 부여된 것이 특이했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직함이 들어간 이들 사절단은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만났다. 정주영 전경련 회장도 이들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했다. 내 기억으로는 알렌에게 한복 정장을 선물했던 것 같다. 그 이후 한미관계는 밀월이라 불릴 정도로 긴밀해졌다. 대통령 이름의 무게만큼 만나는 사람 모두 정성을 다했고 그만큼 큰 성과를 경제사절단이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청와대에 들어간 이상운 상무의 가방에는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 순방 수행 경제인단 파견’이라는 두어 쪽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동석했던 나는 잠깐 설명을 하고 밖으로 나와 대기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렌 사절단 얘기까지 덧붙이니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이후 이 상무는 유럽 출장을 떠났다. 전경련 안에서 이런 서류가 청와대에 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1981년 아세안 순방 때 첫 수행 경제인단

이후 최창윤 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의 재가가 났다는 통보가 왔다. 그냥 가볍게 해본 제안이었는데 실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이 상무가 귀국하기까지 전경련은 초비상 상태에 접어들었다. 일단 전경련이 그 전 해에 출범시킨 한·아세안 경제인 클럽(Korea/ASEAN Business Club)의 국별 위원장에게 나라별로 경협 간담회를 개최하자고 하니 무슨 뜬금없는 얘기냐는 반응이 왔다. 회장실에서는 시간별로 일정이 됐느냐고 독촉이 왔다. 거기다 청와대는 수행 기업인 명단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반드시 현지에서 추진할 프로젝트를 첨부하라는 지시가 왔다. 사무국의 책임자는 해외에 있고 이 모든 일은 신입사원 한 명이 도맡아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거기다 전경련으로서는 전두환의 청와대와 처음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 두렵기조차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 시절의 청와대는 무소불위였고 군인들이 난리 치는 거친 모습 그대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외비로 은밀히 추진되던 사절단 구성이 어느 경제신문에 1면 톱으로 보도가 됐다. 그러자 이런저런 기업들이 너도나도 치고 들어왔다. ‘왜 우리는 빼냐’는 거센 항의가 전경련에 들어왔다. 할 수 없이 사절단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로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거스르게 됐다. 당초 경제5단체장과 기업인 10명 정도로 했던 사절단이 예상외로 대규모가 됐다. 삼성에서는 이병철 회장을 대신해 이건희 부회장이 참석키로 했는데, 이는 이 부회장이 삼성의 후계자로 재계에 처음 데뷔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경협 프로젝트는 윤태엽 당시 전무의 지휘하에 전경련의 전 사무국 요원들이 투입되어 반은 팩트, 반은 희망으로 작성해 청와대에 제출했다. 기업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프로젝트가 청와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장이 사절단에서 빠질 수도 있다고 하니 기업들도 최대한 성실하게 협조해주었다.

사상 최초의 대통령 순방 수행 경제인단은 힘든 여정 속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뒀다. 기업인들은 현지에서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아세안 경제계 지도자 협의회를 구성키로 했다. 또 그해 가을 100여 명의 아세안 각국 기업인을 서울에 초청해 순방 중 추진했던 프로젝트를 하나둘 결실을 맺도록 했다. 세계 최장의 사장교인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싱가포르 래플즈시티, 인도네시아 산림 개발 프로젝트들이 속속 수주됐다. 그해 우리나라의 해외 건설 수주액 83억 달러 중 절반 이상인 57건 48억 달러의 프로젝트가 아세안 국가에서 나왔다. 그만큼 대통령을 수행하는 경제인들은 최선을 다했고 이는 한·아세안 경협 확대의 큰 디딤돌이 됐다. 한국 기업들은 아세안 각국 경제부처 공무원의 한국 연수, 기능공 초청 훈련 등을 시행해 한국의 개발 경험을 공유하면서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경제협력을 추진했다.

상대국서 대통령보다 경제사절단 더 반겨

그 이후 대통령이 바뀌어도 해외 순방 시 경제인들의 수행은 일상적인 것이 됐다. 우리에게도 좋았지만, 상대국에서는 대통령보다 기업 총수들로 구성된 경제사절단을 더 반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경제협력에 왕도는 없다. 정부가 앞서면 민간이 따라가고, 정부가 어려우면 민간이 다리를 놓아 신뢰의 바탕에서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는 길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일본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전경련과 일본 경제단체 연합체 간의 미래 파트너십 기금 설립은 얽히고설킨 정치와 사회를 경제로 풀어가는 큰 고리가 됐다. 40여 년 전 전경련 회관의 조그만 방에서 만들어진 두어 장의 간략한 보고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경제에 큰 울림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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