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4월 양곡관리법 개정과 대통령 거부권

입력 2023-04-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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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동국대 석좌교수(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3월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관리법의 처리를 두고 고민이 깊어진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핵심 골자는 ‘남는 쌀의 정부 매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농식품부는 쌀 재배농민과 농업발전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기에 ‘재의 요구안’을 제안하겠다고 한다, 3월 29일 한 총리도 담화문을 통해 이 법이 가져올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재의(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개정안을 밀어붙인 더불어민주당은 식량 위기에 대비하고 떨어진 쌀값을 정상화하며 ‘농심에 피멍’이 들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야당의 일방적 처리에 국민의 힘은 “반시장적 포퓰리즘 법안이며, 다수당의 입법폭력”이라고 강조한다.

1993년 ‘농안법 파동’ 쓰라린 경험

대통령실은 아직 최종 결정을 유보한 상태이다. 윤 대통령이 그간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혀온 상황이라 거부권 행사가 예상된다.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국회에서 통과한 법률을 재심의 요청하는 첫 거부권이라 부담도 크다. 국회 재석 266명 중 169명이 찬성했다는 의미도 있고, 국회의장 중재안이 일부 반영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농민표나 농민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와 관련 농업 분야에 쓰라린 경험이 있다. 1993년 6월 김영삼 정부가 개혁 기치를 내걸고 농안법(농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개정을 밀어붙였다. 고질적인 병폐인 유통 단계를 줄이고자 도매시장 중매인의 ‘도매거래’를 금지하고 ‘중개’ 행위만 하도록 농안법을 개정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부작용이 많고 시장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큰 혼란이 올 수 있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으나 흐지부지됐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1일 법 시행일이 다가오자 도매시장은 대혼란이 오고 시중 농산물 가격이 크게 상승해 큰 사회적 물의를 야기했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장관을 경질하고 차관, 차관보, 국장, 과장, 담당 사무관까지 문책하는 등 홍역을 치른 사건이 이른바 ‘농안법 파동’이었다.

필자는 경제협력 개발 기구(OECD)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 시장과장으로 농안법 사태를 마무리했다. ‘시장 도매인제’등 새로운 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개혁 수요를 반영하는 동시에 농안법령의 상당 부분을 현실에 맞게 수정했다. 쓰라린 ‘농안법 파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지금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대형 사고가 난다.”

‘매입 의무제’ 시행되면 부작용 불보듯

필자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개정안은 당연히 쌀 생산 증대와 쌀 가격하락을 가져올 것이다. 매입증가와 재정 부담 과중은 불가피하다. 또 매입의무 조항은 시장경제 원리나 글로벌 흐름에 맞지 않고 쌀 재배 농민의 시장 대응력을 저하시킨다.

둘째, 매입 기준은 실제 적용하기 어렵고, 정책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 휘둘릴 우려가 크다.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한다는 기준은 악용될 여지가 너무나 많다.

셋째, 의무매입으로 쌀재배농민의 품질관리가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 당면한 쌀 소비감소 요인으로 ‘밥맛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의무매입은 쌀 품질관리 소홀로 이어지고 소비자들로부터 쌀이 더 외면받게 된다.

넷째, 이 법이 시행되면 정부 정책이 유명무실화될 것이다. 쌀 재배면적을 줄여 적정 가격을 유지코자 하는 ‘감산 정책’이 효과를 보기 어렵다. 쌀 재배 농가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고 억제할 방안도 마땅하지 않다. 또 소규모 영세농가보다는 대규모 쌀 농가의 재배면적 확대 유혹이 더 크다. 대농과 소농의 격차가 심화되고, 농촌 내에서의 ‘농농 격차’는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의무매입보다는 재배면적을 줄여 생산 감소를 유도하고, 자급률이 낮은 밀, 콩과 같은 작물 재배면적을 늘려야 한다.

‘추곡수매제’라는 이름으로 50년을 끌고 온 쌀 매입정책이다. 세계무역 자유화 흐름으로 민간 유통기능을 강화하고자 2005년 이 제도를 폐지하고, 공공 비축제와 쌀 소득 보조금(고정, 변동) 제도를 시행했다. 2020년부터 공익직불금제도도 시행됐다. 다소 문제가 있으나 지속적으로 개선 보완해야 한다. 쌀 정책은 국민 먹거리의 근간을 다루는 일이다. 단견적 처리나 정치적 이용은 금물이다.

우리 농업 앞에 수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하고, 당면한 물 부족 사태도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 농업과 푸드테크, 그린 바이오 진전에 대비해야 한다. 다가오는 글로벌 농업이슈는 너무나 다양하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대비도 힘들다. 이미 시행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도 잘 점검해야 한다. 산적한 현안을 눈앞에 두고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은 정부 매입의무제에 몰입하면 험난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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