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체포 줄었는데 압수수색만 늘어”…대법, 영장제도 개선 공식화

입력 2023-05-02 15:10 수정 2023-05-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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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영장전담법관, 압수수색영장 ‘대면심리’제 논의

압수·수색영장 청구, 2011~2022년 4배 가까이 급증
최근 12년간 ‘구속영장 41%‧체포영장 54%’↓ 대조돼
발부율 91%…“증거인멸·도주우려, 미심쩍지만 발부”
법원행정처 “향후 전자정보 압수·수색영장 실무 개선”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기업과 개인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전자정보 형태로 생성‧보관되는데, 물리적 크기가 작은 저장매체라도 방대한 양의 전자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특히 클라우드 등 다른 서버를 이용할 경우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더욱 방대해진다. 따라서 선별 없는 압수‧수색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 등을 중대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고 언제든지 별건 수사로 이어져 피의자에게 부당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성이 크다.”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형사지원심의관을 맡고 있는 정재우(사법연수원 39기) 판사는 1일 전국 영장전담법관이 참석한 간담회 자리에서 ‘전자정보 압수‧수색영장 실무 개선 관련 형사소송규칙 개정안’ 주제 발표자로 나서 이같이 지적했다.

▲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재판장을 맡은 김명수(가운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착석해 있다. (사진 제공 = 대법원)
▲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재판장을 맡은 김명수(가운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착석해 있다. (사진 제공 = 대법원)

전자정보 압수‧수색 전 사건 관계인을 법원이 직접 심문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에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물론 경찰,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단체까지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대법원은 전자정보 압수‧수색 영장제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2일 “영장전담법관들은 전자정보 및 그 저장매체의 특수성상 압수‧수색영장 발부 단계에서 적절한 통제가 필요했던 사례들을 공유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형사소송규칙 개정안 쟁점 가운데 임의적 대면심리의 경우 심문 대상, 심문기일의 구체적인 운용 방식, 해외 실무례에 대해 심도 있는 토의가 진행됐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법원은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은 간담회에서 공유된 의견을 정리해 향후 압수‧수색영장 실무의 개선안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대법원이 개정작업 실무를 주도하는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전자정보 압수‧수색 영장제도를 고치겠다는 뜻을 법원 내‧외부에 공식화한 것이다.

수백만 건 파일, 선별 포기도…압수제외정보 폐기 이슈

검‧경 등 수사기관은 수사 전문가들의 수사 밀행성을 해치고 재판 전문가인 법관이 수사까지 하겠다는 발상이라며 크게 반발하는 상황이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압수‧수색영장 대면 심리제는 주요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로 수사 상황이 피의자에게 실시간으로 노출될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수사 초기 단계에선 증거물을 충분히 확보해 분석하는 일이 중요한데, 문제는 혐의 연루자들의 주거지든 사무실이든 일단 뒤져봐야 알지 뭐가 있는지 어떻게 미리 알고 찾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동안 충분히 숙고한 사안으로 휴대전화, 컴퓨터, 서버 등에 저장된 전자정보 압수‧수색이 일반화된 현 시점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란 입장이 확고하다. 법원행정처는 올해 1월 형사소송규칙 일부개정 규칙안을 만들어 2월 3일부터 입법예고와 동시에 관계기관 의견 조회를 시작한 상태다. 2020년 9월 24일 전자정보 압수수색 연구‧검토 안건이 사법행정자문회의에 회부된 지 근 3년 만이다.

법원행정처는 전국 영장전담법관 간담회 자리에서 A 회사에 입사한지 3년 된 사내변호사 갑의 실제 사례도 공개했다. A 회사의 대주주인 B는 갑의 입사 전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수사기관은 A 회사를 압수‧수색하면서, 사내변호사 갑의 카카오 톡(PC버전), 이메일 등과 함께 말단 직원을 포함한 수많은 직원의 PC를 압수했다.

정 판사는 “수백 개의 정보저장 매체, 수백만 건의 파일을 현장에서 선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우선 복사해간 이후 다음 날 수사기관에 출석해 선별 작업을 진행했는데, 갑의 PC 카카오 톡을 일일이 열어보는 데만 수 시간 넘게 소요되는 등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수사기관에 협조하는 게 회사에 유리하다’는 변호인 조언을 이유로 선별 절차를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복사를 해간 뒤 선별 절차를 통해 압수 대상에서 제외된 정보가 제대로 폐기 처리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한 대형 법무법인의 형사전문 변호사는 “공정거래법 위반 등 기업수사를 벌일 때 해당 기업 각종 사업을 법률 자문한 로펌 측 자문서류를 변호인의 휴대전화‧PC, 로펌의 서버‧클라우드 등을 압수해 확보함으로써 검사가 혐의를 둔 사업에 있어 기업 쪽의 고의성을 입증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기업자문이란 게 본래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건데 법적 대리인단을 털어 혐의를 입증하려는 수사 자세는 행정 편의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이런 방식으로 검‧경 등 수사기관이 입수한 증거에 대해선 변호사가 재판부에 증거채택 거부를 요청하면 증거능력을 상실한다.

▲ 2011~2022년 최근 12년간 압수‧수색영장 청구 및 발부 추이. (자료 제공 = 대법원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 2011~2022년 최근 12년간 압수‧수색영장 청구 및 발부 추이. (자료 제공 = 대법원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강제수사 축 ‘인신구속→압수수색’ 변경…사생활 침해 위험↑

대법원에 따르면 압수수색 영장 청구는 2011년(10만8992건)부터 2022년(39만6671건) 사이 363% 이상 급증했다. 최근 12년간 4배 가까이 폭증한 수치다. 반면 같은 기간 구속영장 청구는 3만7948건에서 2만2589건으로 40.5% 감소했고, 체포영장 청구는 5만9173건에서 2만7426건으로 53.7% 급감했다. 최근 강제수사 중심축이 기존 인신구속에서 압수수색으로 변경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지난해 기준 약 91.1%에 이른다. 압수수색 영장을 담당하는 판사들은 행여 영장을 기각했다가 증거인멸이나 범인을 못 잡게 되는 애매한 후폭풍을 겪을까 봐 미심쩍더라도 장소와 매체조차 특정되지 않은 영장을 기각하기란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영장 발부율이 높아지는 이유다.

▲ 2011~2022년 최근 12년간 구속‧체포영장 청구 및 발부 추이. (자료 제공 = 대법원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 2011~2022년 최근 12년간 구속‧체포영장 청구 및 발부 추이. (자료 제공 = 대법원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정 판사는 “전자정보 압수‧수색으로 인한 시민의 사생활 침해 위험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면서 “‘나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만으로는 이러한 침해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1997년 시행된 구속 전 피의자 심문(구속영장 실질심사) 제도는 고(故) 윤관 전 대법원장의 가장 대표적인 개혁 성과로 꼽힌다. 압수‧수색영장 대면 심리제도가 도입된다면 김명수 대법원장 재임시절 최대 치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일경 기자 ek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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