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옆에 또 '거부권'…협치 실종 '짐승 국회'

입력 2023-05-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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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대통령 거부권 사실상 '강제'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정부·여당과 야당의 강 대 강 대치는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이후 폐기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이어 현행 의료법 내 간호 관련 내용을 분리하는 내용의 간호법 제정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정국은 더욱 악화되는 분위기다.

9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부에 이송된 간호법 제정안이 상정되지 않으면서 16일 국무회의에 상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간호법의 공포 혹은 재의요구 시한은 19일이다.

간호법 제정안은 현행 의료법 내 간호 관련 내용을 분리해 간호사 및 전문간호사, 간호조무사의 업무 범위를 정하고, 간호사 등의 근무 환경·처우 개선에 대한 국가의 책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간호협회는 초고령 사회 등에 대비해 우수한 간호인력을 양성하고 의료기관과 지역사회 등에 적정 배치하기 위해 간호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대한의사협회,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다른 보건의료단체들은 간호법이 다른 보건의료직역의 업무를 과도하게 침해하고, 향후 간호사의 '단독 개원', 즉 독립적인 의료 행위를 가능케 하는 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의료연대는 간호법에 반대하고자 3일 부분파업한 데 이어 11일에도 같은 방식의 파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아울러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16일까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연대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맞서 대한간호협회는 간호법의 조속한 공포를 촉구하며 이날부터 간호협회 회관 앞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을 시작하기로 했다.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 표결 내용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 표결 내용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이어 두 번째 거부권 행사가 된다. 앞서 윤 대통령은 쌀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수확기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로 전량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집권 이후 처음으로 거부권을 행사했고, 본회의에 상정돼 재표결이 이뤄졌지만 부결돼 폐기 수순을 밟았다.

정부·여당은 간호법 통과 이후에도 직역단체 등과 중재를 시도하고 있지만, 불발될 경우 결국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본회의가 있었던 지난달 2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 당은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민주당이 끝내 강행처리한다면 대통령께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 드릴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다만, 계속되는 거부권 행사는 윤 대통령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민주당 등 야당은 간호법 제정안 외에도 50억 클럽 특검과 김건희 여사 특검 등 이른바 '쌍특검'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고, '방송3법 개정안'도 본회의에 직회부하면서 추가적인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야당이 최근 법안의 단독 처리를 강행하는 배경에는 여당이 사실상 이를 물리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어서다. 21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180석에 달하지만, 국민의힘은 115석에 불과해 야당이 밀어붙이는 법안 통과를 막기가 어렵다.

다만, 대통령이 정부에 이송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에서 재표결에 부쳐질 때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해 야당 의원들을 모두 끌어모아도 재의결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여당에서는 해당 법들의 통과를 막기 위해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밖에 없으며, 야당이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부권 행사를 사실상 강제하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가 2일 오후 국회에서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의 예방을 받고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가 2일 오후 국회에서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의 예방을 받고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의 계속되는 거부권 유도는 의회 민주주의 근간인 '협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회는 합의제로 운영돼야 하는 곳이지 다수제로 운영되면 안 된다"며 "민주당이 국회를 다수제로 운영하지 않고 합의제로 운영했더라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오히려 그걸 빌미로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다고 공격할 텐데, 야당에 불리할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여당과의 협상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반 정당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야당은 윤석열 정부나 여당의 대안 정당이 돼야 하고, 과반 정당이기 때문에 여당이 반대하더라도 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국회 다수당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든 그와 무관하게 야당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선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한 이후 야당 지도부와 공식 회동을 가진 적이 없다. 지난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대표가 선출된 뒤 이 대표가 수차례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앞서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2일 취임 축하 인사차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와 만날 의향이 있다"고 전했지만, 박 원내대표는 '대통령은 당 대표를 먼저 만나는 것이 순서'라며 사실상 제안을 거절했다. 윤 대통령과 야당 회동이 이뤄지지 않은 지는 9일 기준 365일째로, 이미 역대 최장 기간을 돌파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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