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브렉시트, 다시 북아일랜드의 정체성을 깨우다

입력 2023-05-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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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평화협정 25주년 맞은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30년 유혈투쟁…1998년 협정 체결

‘WASP.’

소문자로는 ‘말벌’이란 뜻이다. 대문자로는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약어다. 미국을 다스리는 엘리트층이 주로 이렇게 구성됐다는 의미다. 17세기 초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도착했다. 이들과 함께 19세기에 아일랜드와 독일 등 주로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뤘다.

지난달 11일부터 3박4일간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이제껏 미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가장 긴 여정이었고 그는 아일랜드에서 3일을 체류했다. 가장 작은 나라가 최장기간 미 대통령을 머물게 했다. 그렇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왜 이렇게 아일랜드에 공을 들였을까? 미 국내정치와 영국의 유럽연합탈퇴(브렉시트)라는 국제정치적 요인, 두 가지를 다 점검해봐야 한다.

바이든, 아일랜드 방문…재선운동 시작

1960년대 초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와 조 바이든은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이라는 점 이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가톨릭 교도라는 점이다. 즉 WASP가 아니다. 이민자로 이뤄진 미국 사회에서 출신 국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보면 아일랜드 출신이 독일계에 이어 2위다. 미국 인구의 10%에 가까운 3200만 명이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여겼다. 1845년 아일랜드의 감자 흉작으로 20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후에도 신대륙으로 간 아일랜드인들이 꽤 많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바이든이 이렇게 아일랜드 방문에 공을 들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유권자 가운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 아일랜드계에게 대통령 역시 아일랜드 출신이며 ‘할아버지의 나라’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방문 후 열흘이 흐른 지난달 25일 바이든은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복원·투자 연계

‘The Troubles.’ 소란, 소요라는 의미다. 영국에서는 1969년부터 30년간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쟁취하려는 유혈 투쟁을 이렇게 부른다. 다분히 영국의 입장에서 붙인 명칭이다.

1차대전 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계속해서 영국의 땅으로 남았다. 영국인들이 북아일랜드의 지배층이 돼 아일랜드계를 구조적으로 차별했다. 영국과의 연합왕국을 지지하는 친영파 정당만 참여해 경찰과 교육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거의 다 영국인으로 충원됐고 비상법안이 도입돼 이곳에 거주하는 아일랜드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에 반발해 아일랜드계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해서 벌이자 1969년 8월 영국군이 이곳에 주둔하게 됐다.

영국군의 주둔을 계기로 북아일랜드에도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테러단체 아일랜드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이 결성됐다. 주로 IRA가 친영파와 영국 정치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였지만 북아일랜드의 친영파들도 준군사조직을 결성해 아일랜드계 주민을 다치게 했다. 30년의 유혈투쟁으로 사망자만 3400명이 넘고 부상자를 합하면 거의 4만 명에 가깝다.

이런 유혈투쟁의 악순환을 끊은 게 1990년대 미 클린턴 행정부였다. 그는 조지 미첼 상원 의원을 특사로 임명해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의 친영파·친아일랜드 정당 대표자들과 협상을 벌이게 중재해서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평화협정이 체결됐다. IRA의 무장해제와 친영파·친아일랜드파가 벌인 범죄 행위의 불기소, 친영파·친아일랜드파가 함께 참여하는 자치정부 구성이 이 협정의 핵심내용이다. 당시 조 바이든은 상원 외교위원회 소속으로 이 협상을 지켜보며 지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평화협정 25주년을 계기로 방문한 자리에서 기능이 정지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하루빨리 복원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북아일랜드의 최대 투자자로 약 1만3000개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다분히 미국에 있는 아일랜드계를 향한 선거운동이다. 바이든은 브렉시트를 ‘어리석은 짓’으로 여긴다.

작년 2월 친영파 정당인 민주연합당이 영국의 브렉시트 조약 가운데 북아일랜드 관련 조항이 문제가 있다며 자치정부에서 탈퇴했다. 지난 3월 이들의 불만사항을 반영해 영국 본토에서 북아일랜드 소비용으로 반입되는 상품의 경우 대폭 통관을 간소화한다고 영국과 EU가 합의했지만 민주연합당은 계속해서 자치정부에 불참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월 14일(현지시간) 아일랜드 발리나의 성 무레다크 대성당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월 14일(현지시간) 아일랜드 발리나의 성 무레다크 대성당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연합왕국서 탈퇴 움직임 커져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화협정을 지속하려면 일부 조항을 손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북아일랜드 2대 정당만 자치정부에 참여할 수 있다. 친영파 민주연합당과 친아일랜드계 신페인이다. 신페인은 우리 땅이라는 의미로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원한다. 지난해 5월 총선에서 신페인이 제1당이 됐다. 자치정부가 기능 정지된 후 열린 총선이다. 반면에 친영·친아일랜드도 아닌 제3의 정당인 연정당(Alliance Party)이 점차 지지를 얻고 있다.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고 잦은 자치정부의 기능 정지를 줄이기 위해 평화협정을 개정해 지지도가 세 번째인 정당도 자치정부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고 FT는 제안했다. 2000년부터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40%가 양당 중 하나의 거부권 행사로 기능정지됐다. 이 조항을 수정하지 않으면 잦은 기능 정지는 불가피하다.

자치정부의 기능복원과 함께 또 하나의 현안이 주민투표다. 평화협정은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묻는 주민투표가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친아일랜드계인 가톨릭 신자 수가 친영계 개신교 숫자를 넘어섰다. 가톨릭이라고 무조건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25년 전과 비교해 큰 변화다. 당시는 친영계 개신교의 수가 58%를 차지했다.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북아일랜드는 55.8%가 EU 잔류를 찬성했다. 이후 친영파 정당이 계속 강경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자 친아일랜드계는 내심 반기고 있다. 평화협정으로 아일랜드와의 통일 문제가 물 밑으로 잠겼다고 여겼는데 난데없이 브렉시트가 터졌다. 브렉시트는 휴화산이던 북아일랜드의 정체성에 불을 붙였다.

주민투표 가능…아일랜드와 통일될까?

지난달 11일 영국 리서치업체 유거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원칙상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와 통일하는 주민투표가 있어야 한다에 찬성한 영국인이 36%로, 반대한 사람보다 2배가 많았다. 영국은 연합왕국으로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이뤄졌는데 이 가운데 북아일랜드의 탈퇴 가능성이 점차 높아졌다.

2014년 9월 스코틀랜드에서는 연합왕국의 잔류·탈퇴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10%포인트 차이로 잔류가 결정됐다. 하지만 62%가 브렉시트를 반대했던 스코틀랜드는 계속해서 제2 주민투표를 협상용 카드로 활용해왔다. 제1정당인 스코틀랜드민족당은 원래 올해 안에 제2 주민투표를 강행하려 했으나 작년 영국 대법원이 이를 불허하면서 사실상 투표가 매우 어려워졌다.

반면에 북아일랜드 주민투표는 평화협정에서 보장됐다. 앞으로 5~10년 안에 협정이 보장한 대로 주민투표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거의 7년 전에 치러졌지만 이것이 야기한 연합왕국 영국 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은 스페인 등 다른 유럽 국가의 분리 독립주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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