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다큐버스] 민간인 학살 ‘송암동 사건’의 재구성

입력 2023-05-11 13:33 수정 2023-05-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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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의 다큐버스] 타인의 삶을 가장 자세히 들여다보는 영화 장르가 다큐멘터리입니다. 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는 때, 사람을 쫓는 작품(Documentary) 속 지긋한 시선을 따라 우리 주변 세계(Universe)를 깊이 살펴보는 글을 씁니다.

“여 아줌마 관을 잘 내려야됭께, 끝에 있는 네 명이 이거 내리는 것쫌 도와주쑈.” 말이 끝나자 트럭 위에 올라탄 남자 여러 명이 흰 관을 조심스럽게 들어내려 가족에게 건넨다. 이때 멀리서 차 좀 얻어 타자며 나타난 이가 물어온다. “근데, 송암동은 뭐다러들 가요?” 질문을 들은 이가 시민수습대책위원을 자처하며 답한다. “아~따 상황실에 무전 안 왔는가. 고짝에서 총소리가 들린다고, 가서 총기 있음 회수해오란디 혹시나 미성년자들이 들고 있으면 괜히 사고라도 날깝시 글제.”

▲ '송암동' 스틸컷. 송암동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탄 시민군들이 대화하던 모습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주)훈프로)
▲ '송암동' 스틸컷. 송암동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탄 시민군들이 대화하던 모습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주)훈프로)

8일 특별공개된 영화 ‘송암동’이 재현한 장면이다.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으로 향하는 트럭 위에서 시민군 이재남, 최영철, 이강갑 씨가 나눈 대화다. 3일 전인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벌인 집단발포로 시민 약 200여 명이 다치거나 숨졌다. 이들 시민군은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신을 추려 집으로 데려다주는 동시에, 시 외곽 송암동 근처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트럭을 몰고 나선다. 영화 속 장면은 1989년 2월 국회에서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당시 함께했던 또 다른 시민군 최진수 씨가 증언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영화 ‘송암동’이 다시 이 장면을 주목하는 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알리고 추가적인 피해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서다. 이른바 ‘송암동 사건’은 발생 40년 만인 2020년이 돼서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를 통해 처음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다. 시민군을 색출하려던 계엄군이 송암동에 먼저 도착해 있던 아군의 존재를 오인해 교전을 벌였는데, 공수부대원 9명이 사망하는 등 내부 인명피해가 극심하자 일종의 보복 성격으로 인근 피란민과 시민에게 총구를 겨눴다는 것이다. 당시 11세였던 전재수 군, 13세였던 방광범 군이 총에 맞아 숨졌고 아들 줄 음식을 광주리째 이고 가던 49세 박연옥 씨도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을 연출한 건 이조훈 감독이다. 박정희 정권의 강제노역 참상을 고발하는 ‘서산개척단’(2018),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영상기록이 사라진 상태임을 지적하는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2020)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를 연출해 온 그의 문제의식이 이곳 ‘송암동’으로 옮겨왔다. 2020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전문위원 자격으로 합류한 그는 송암동 사건 피해자와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 등 관련자 100여 명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들의 증언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 '송암동' 스틸컷. 송암동 사건으로 사망한 당시 11살 나이 전재수 군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주)훈프로)
▲ '송암동' 스틸컷. 송암동 사건으로 사망한 당시 11살 나이 전재수 군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주)훈프로)

‘송암동’은 극영화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에는 관련자 취재와 사회고발이라는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핵심이 선연히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영상이나 문서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고스란히 반영한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를 섭외해 연출했다. 때문에 창작을 기반으로 한 일반적인 극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작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송암동’은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집요하게 공론화하려는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스트의 작업 확장 방식이자, 무고한 죽음의 전말조차 세상에 제대로 알리지 못한 무명씨들의 역사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려는 한 작업자의 적극적인 분투다.

‘송암동’이 겨냥하는 최종 목적은 사건 책임자를 분명히 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이다. 영화는 국제인권법에 따라 공소시효 제한 없이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책임자를 기소할 수 있음을 적시한다. 8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특별공개회에서 이 감독은 차마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누지 못했던 후임병을 대신해 직접 15~20명가량을 총으로 쏴 죽인 군인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 감독의 손끝에서 재구성된 ‘송암동’이 완성본으로 공개되는 올 하반기, 오래 전 ‘행방불명자’라는 단출한 말로밖에는 정의되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의 실마리가 새롭게 풀릴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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