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의 자본전환 강제화 안해도
지주회사 통한 손실흡수 가능해
구제금융 없이도 같은 효과얻어
한국 실정에 맞게 제도 갖추길
예기치 못한 고금리 여파로 미국 금융기관들의 파산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금융당국에 의한 구제금융 없이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신속하게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이는, 금융안정이사회를 중심으로 주요국들의 금융당국이 납세자들이 아니라 채권자들에 의한 손실 분담에 기반한 정리제도를 준비해 온 노력 결과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일정한 규모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 해당 금융기관에 대한 파산처리가 금융시스템 전체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구제금융으로 해당 금융기관을 정상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대두됐다. 이는 왜 특정 금융기관의 손실을 해당 금융기관에 투자한 채권자들에 앞서 납세자들이 분담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금융시스템상 중요한 금융기관들의 경우 구제금융에 의존하지 않고 채권자들의 손실 분담을 통한 부실금융기관 정리절차를 사전에 준비토록 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채권자 손실 분담에 기반한 정리제도는, △특정 금융기관의 손실이 다른 금융기관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고, △해당 금융기관의 금융기능은 유지하며, △해당 금융기관의 손실은 납세자들이 아닌 채권자들이 흡수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해당 금융기관의 금융기능 유지를 위한 채권자들에 의한 손실 흡수는, 채권의 상각뿐 아니라 자본전환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채권자들에 의한 손실 흡수는 각 채권 계약마다 명시하는 형태, 혹은 법으로써 강제하는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데, 금융안정이사회는 법으로써 강제하는 ‘법규형 베일인 제도’를 권장한다.
일본의 경우, 존속법인의 채권에 대한 자본전환을 강제할 법적인 근거가 미비하다. 우선 순위에 따른 채권 상각은 채권의 고유한 특성에 부합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강제적인 자본전환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금융청은 손실흡수력 규제 가이드라인 문서에서 ‘일본은 채권자 손실부담(채권의 상각뿐 아니라 자본전환도 포함)의 법적 메커니즘이 완비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실제 일본의 거대 금융그룹들도 일본 내에서는 별도의 손실 흡수 조항을 명시하지 않은 채 채권을 발행하고 있으며, 일본 금융청도 그러한 채권들도 다른 조건만 충족시키면, 손실흡수력 적격성을 인정해 주고 있다.
일본 금융청이 말하는 법적인 메커니즘이란, 거대 금융그룹의 주요 자회사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경우, 해당 자회사는 지속적으로 금융기능을 수행하는 대신, 고유의 금융기능 없이 경영관리 기능만을 수행하는 그룹 내 지주회사가 그 손실을 흡수하고, 이후 지주회사의 건전 자산은 선별적으로 가교금융기관으로 이전되며, 손실을 흡수한 지주회사는 잔여 자산과 함께 파산하게 되는 절차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주요 자회사는 지주회사로 손실을 이전할 뿐 아니라, 지주회사로부터 지속적인 금융기능 수행에 필요한 자본도 확충한다. 결국 ‘채권의 직접적인 자본전환’을 강제하지 않고도 채권의 자본전환과 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금융안정이사회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은 채권자 손실분담의 한 형태인 채권의 자본전환을 위한 법률이 미비된 국가로 분류하지만, 해당 보고서의 각주를 통해 일본 금융청이 법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보고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금융기관들과 금융청이 일본 국내에서 채권자 손실분담 요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채권을 발행하는 것과 그러한 채권을 손실흡수력 적격 상품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동일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금융안정이사회의 제안을 충실히 따라서 현재 법규형 베일인 제도를 준비 중이다. 실제 국내 일각에서는 당위론적인 접근 방식을 바탕으로 입법 가능성을 낙관한다. 그러나, 자본계정이 ‘제로’가 아닌 존속법인의 채권을 강제로 자본 전환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당국에 부여한다는 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금융안정이사회의 원안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일본 금융청처럼 하나하나 따져서 고유의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 법률이나 제도적 기반이 비슷한 일본의 제도를 잘 분석해 유사한 제도를 만든다면 금융안정이사회와의 논쟁 역시 비켜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