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기업 생태계 위협하는 ‘협업’의 두얼굴

입력 2023-05-22 06:00 수정 2023-05-2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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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기술탈취 패턴은 날이 갈수록 정교하고, 복잡해진다. 대기업이 먼저 접근해 지분투자나 공동개발, 협업 등을 제안하고, 기술을 공유하면 이를 복제해 유사한 모델을 출시하는 방식이다. 중소기업이 아이디어와 기술적인 내용을 전달한 뒤 소통이 단절되거나 투자가 결렬되기도 한다. 위장가입을 통해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를 분석하는 사례도 나온다. 중소기업들은 비밀유지협약(NDA)을 체결하지만 무용지물이다.

중소기업들은 이 분쟁 과정에서 숱한 횡포에 휘둘린다. 민망할 정도의 베끼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도 대기업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뼈와 땀, 청춘을 갈아 넣어 탄생시킨 기술을 길에 떨어져 누구나 주울 수 있는 기술 쯤으로 전락시킨다. 일부 대기업은 특허등록무효 소송 카드도 빼든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 피해를 호소한 한 건강 관리 플랫폼 스타트업 대표가 "갑의 횡포 그 자체"라고 지적한 것을 보면 대기업들의 가로채기 과정이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난폭한지 짐작할 수 있다.

기술탈취 분쟁을 겪는 중소기업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문제 해결 과정이다. 애초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인 데다 중소기업들은 피해 사실, 피해 규모, 가해자의 고의성 등 구체적인 피해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법적 분쟁에 대응할 전담 인력이 없는 중소기업들은 창업자가 분쟁 해결에 온전히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사업은 좌초 위기에 빠지고, 정상적인 경영이 사실상 어려워진다. 이는 기술개발에 대한 동력과 의지 상실로 이어진다.

피해기업을 구제할 법과 제도의 구멍도 기업을 지치게 하는 요인이다. 현행 부정경쟁방지법에서 아이디어 침해나 데이터 부정사용, 성과물 침해의 경우 형사처벌 규정에서 제외된다. 성과물 침해 피해기업에 대한 구제수단은 민사소송이뿐이다. 아이디어 침해, 데이터 부정사용 등은 상대 기업의 위법성이 인정되면 시정권고 정도의 조치만 내릴 수 있다. 대기업들이 시정권고를 불이행하면 공표가 가능하지만 이는 피해기업들이 실질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긴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피해 기업들이 영업비밀 요구행위 금지 법제화, 부정경쟁방지법상 형사처벌 규정 신설, 손해배상 범위 확대, 소송지원 등 강력한 법과 제도의 '힘'을 촉구하는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막강한 규모와 자금력을 내세워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대기업의 비윤리적 행태는 단기적으로는 해당 기업의 성장을 압박하는 수준에 그칠지 모르나 멀게는 기업간 협업과 상생, 젊은 기업가의 탄생 등 기업 생태계 전반을 깨뜨리는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와 여의도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납품대금 연동제는 2008년 논의 테이블에 오른 뒤 시장에 맡겨졌지만 자율성의 한계에 결국 14년 만에 법제화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했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선 기울어진 판에서 그들이 넘어지지 않고 공정하게 설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원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나마 정부가 복잡한 창구를 일원화 하기 위해 기술탈취 신고센터를 마련하는 등 노력하고 있는 점은 반가운 소식이다.

수십조의 대규모 자금만이 유니콘을 키우는 길은 아니다. 작은 기업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혁신 기술을 주춧돌 삼아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는 것이 치열한 글로벌 혁신에서 우리 산업계가 생존하는 길이다. ESG의 이름으로 공정한 거래와 경쟁, 상생을 내세우는 대기업의 협업 뒤 얼굴이 더 교묘해지고 무서워지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입과 발이 필요하다.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다른 국가와 달리 국내에 기술기반 유니콘이 적은 이유 중 하나는 기술개발의 결과물을 보호받을 수 없는 미흡한 제도때문이라는 한 스타트업 대표의 말이 귀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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