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플라자] 정치보다 국민 택한 日재계의 변신

입력 2023-06-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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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사회공헌사업 양대 축
기업과 국민 일체감·공감대 키워
‘진정성’이 신뢰 얻게 한 원동력
투자늘고 경제 호조세로 돌아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의 비약적 성장에는 정관재(政官財)로 불리는 3각 연대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보수 정치가 관료를 통제했고 관료는 재계를 규제했다. 재계는 정치자금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강철같이 단단했던 이 순환고리가 1994년 사회당의 집권을 계기로 와해됐다. 사회주의가 당론인 정당에 재계가 정치자금을 줄 수는 없었다. 집권당과 재계의 대화가 사라지고 수박 겉핥기 식의 내실 없는 만남만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정치라는 비빌 언덕을 잃은 재계는 국민을 택했다. 기업의 긍정적 역할을 국민 속에 투영시키고 국민 여론을 뒷배로 정치, 행정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정립해 갔다. 재계의 대표인 게이단렌(經團連) 주도로 기업사회공헌이 조직화되고 경제교육이 핵심사업으로 부상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정치는 돈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게이단렌은 경제광보센터를 주축으로 경제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필자는 1995년 초 경제광보센터에서 근무하면서 경제교육이 어떻게 짜여지고 실행되는지를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광보센터에는 게이단렌 직원뿐 아니라 기업에서 직접 파견된 직원들이 절반 가까이 있었다. 경제교육에는 학자와 관료가 아니라 기업의 전·현직 임원들이 강사로 직접 나섰다. 기업의 눈으로 일본의 성장이 어떻게 이뤄졌으며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지 대학과 지역사회에 파고들었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전달됐다.

간사이(오사카), 규슈(후쿠오카), 홋카이도(삿포로) 등 거점 지역에는 게이단렌 회장단이 직접 출동해 간담회를 가졌다. 추진 동력이 생긴 경제교육사업의 전국적 확산을 꾀한 것이다. 또 도요타 쇼이치로(豊田章一郞) 게이단렌 회장은 ‘매력있는 일본’이라는 총체적인 국가목표를 제시하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진 일본의 혁신을 주창했다. 재계의 숙원이었던 지주회사 도입, 금융규제 완화 등이 성사된 것은 경제교육으로 형성된 기업과 국민의 공감대가 한몫을 했다.

게이단렌은 경제교육의 추진과 함께 기업사회공헌의 체계화에도 눈을 돌렸다. 마침 고베(神戶)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기업사회공헌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획기적으로 일깨웠다. 당시 일본 기업과 게이단렌의 긴밀하고 짜임새 있는 구호활동은 필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게이단렌은 사회공헌 담당 간부를 고베에 상주시키며 기업의 구조활동을 독려하고 조정했다. 마실 물이 모자라면 음료회사들에 생수를 요청하고 전기, 배수, 숙식 등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전문가로 구성된 기업의 자원봉사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재계에서는 구호금보다 자원봉사를 비롯해 현장에 필요한 물품을 회원사가 직접 제공해 주는 방식으로 구호활동을 펼쳤다. 기업의 물품과 인력을 재난 극복에 동원하는 것이 주(主)였으며 금전적 지원에는 오히려 소극적이었다.

당시 게이단렌과 오랜 제휴관계에 있던 우리나라의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100만 달러를 구호성금으로 보내왔는데 이를 받을지 말지를 회의를 열어 결정할 정도로 현금 지원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100만 달러를 기부하고도 일본 신문에 크게 나기를 바랐던 전경련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눈치를 보여 게이단렌과의 소통을 맡았던 필자가 낯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진정성은 그때 게이단렌 사회공헌사업의 대전제이자 국민을 향한 핵심적 메시지였다.

경제교육과 사회공헌사업으로 국민과의 직접 대화를 모색한 게이단렌은 경제단체의 구조조정을 선도해 회원사들의 부담을 덜고 정부에도 행정 개혁을 요구할 명분을 만들었다.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게이단렌과 노사 문제를 전담해 온 닛케이렌(日經連)의 통합이 2002년에 이뤄짐으로써 재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쌓이는 계기가 됐다.

일본 경제의 최근 성장세가 괄목할 만하다. 올해 한국보다 두 배나 되는 성장률이 예측되고 있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외국기업의 투자가 줄을 잇고 있고 곳곳이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정치보다 국민을 택한 일본 재계의 변신으로 물꼬가 터졌고 진정성을 전제로 한 사회공헌과 경제교육은 기업과 국민의 일체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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