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역지사지 산중호걸

입력 2023-06-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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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90년대생 아들과 딸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을 낯설어 한다. 30년 전에 처음으로 IBM XT를, 비슷한 시기에 핸드폰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 잘 실감하지 못한다. 대화가 겉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다. 아버지 세대가 전해주는 광복과 한국전쟁, 4.19와 5.16은 역사공부의 대상은 될지언정 나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로에게 같은 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진솔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을 가르쳤다. 무려 2500년 전이다. 물론 ‘스스로 원하지 않는 바’ 뿐만 아니라 ‘원하는 바’ 역시 이제는 남에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늙고 젊고 상관없이 라떼와 꼰대에 대한 경고가 커지는 만큼 소통과 배려가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한다.

민간경제단체 상근부회장이 된 뒤 가장 중요한 나의 역할이 뭘까 고민해 왔다. 불확실한 것에 천착하느니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자세를 갖고 실천 중이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과 민간 사이에서의 가교 역할이라 생각하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풍경이 변한다. 모든 입장은 각자의, 나름의 입장이다. 공공의 인식과 습성은 민간의 것과 다르다. 공공은 때로 갑처럼 굴고, 민간은 종종 일단 공 선생이라며 답답해한다. 공공이 볼 때 민간은 느리고 주어진 일에만 집중한다. 적극적이지 않고 시야가 좁다. 반면, 민간이 볼 때 공공은 고객 감동 보다는 지침과 지시 일색이다. 협력 관계를 상하 관계로 오해한다. 책임을 지지 않고 솔선수범에 인색하다.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오해일 터다. 문제는 안 보고 살 수 없다는 건데, 경제가 중요한 만큼 공공과 민간의 협력은 필수다. 글로벌 경쟁 시대는 공공과 민간의 원팀을 요구한다.

답은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다. 상호 존중과 배려는 기본이다. 핵심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이보다 더 중요한 출발점,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성공한 중견기업인은 경제적인 이익은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에도 기여하는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단순한 이윤 추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소명을 인식하며 행동한다. 특히 역지사지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한 협력을 추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대상은 고객과 직원, 바로 사람이다.

고객(Customer)을 초대손님(Guest)으로 바라보는 일터, 일하고 싶은 사람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제니엘 박인주 회장). 난 우리 회사 직원들을 구성원이라 칭한다. 구성원들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하는 사람이다. 일은 종업원적 관점, 문제해결은 주인의 관점이다(삼구아이앤씨 구자관 책임대표사원). 매출을 줄이더라도 내실을 갖추자, 중요한 건 정직, 성실, 도전정신, 자기계발, 자긍심, 화합이다(보미건설 김덕영 회장). 경영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 세상의 행복 총량을 늘리는 데 있다(마이다스아이티 이형우 회장). CEO의 한계를 깨닫고 전문성 있는 사람들을 찾아 적재적소에서 역량을 발휘케 해야 한다(DH글로벌 이정권 회장). 기술개발과 인재육성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YIK 최명배 회장), 믿음과 신뢰, 인간관계, 무엇보다 정직한 사람들이 협력할 때 이 세상을 바꾼다(대창 조시영 회장).

백발의 창업주도 해외에서 MBA를 마친 2세, 3세 중견기업인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잊고 대화를 나눈 많은 중견기업인들은 경제적인 성공은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에 관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적인 영향력과 책무를 인식한다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을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믿는다. 성공의 비결이자, 한 번 사는 인생의 궁극적인 보람이기도 하다.

세대, 직급, 직업 등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면 된다. 공자가 말한 물시어인의 내용보다 마주 선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일, 두 발로 서게 된 인류가 앞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 수 있게 된 까닭일지도 모른다. 최근 산업부와 중견련의 젊은이들이 ‘산중호걸’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정책 토론과 업무 협의의 장이라는데, 아마 밥도 먹고 가끔은 소주도 한잔 기울이리라 믿는다. 때로는 풍경화보다 인물화가 더 근사하다. 역지사지의 시간이 깊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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