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력없고 인간적 예의도 문제
헌법적 가치까지 부정할까 걱정
온라인 논쟁이 길어지면 히틀러가 튀어나온다는 이론이 있다. ‘고드윈의 법칙’이다. 긴 논쟁은 십중팔구 인신공격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설을 한다”고 했다. 그 통찰 그대로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다만 용어는 다채롭다. 요즘은 종성초성체로도 마무리된다. 일반적으론 한남충, 김치녀, 좌빨, 수꼴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악마화의 주된 과녁은 뭘까. ‘혐오표현 식별 AI 연구그룹’의 지난해 분석에선 ‘연령 혐오’가 가장 흔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다. 키배(키보드 배틀)를 장식하는 어휘는 나이를 트집 잡는 신조어다. 이를테면 ‘틀딱충’ 같은….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이 자초한 ‘노인 폄하’ 논란이 새 라운드로 진입했다. 3일 문제 발언을 사과하면서다. 김 위원장은 대한노인회에서 “마음 푸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혁신위원장 사퇴는 선을 그었다. 이제 당 혁신에 속도를 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문제 발언은 지난달 30일 서울 성동구에서 열린 청년 좌담회에서 나왔다. 화근은 아들과의 과거 대화였다. 둘째 아들이 중학생 때 “왜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해?”라고 물었다면서 남은 수명에 비례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을 늘어놓은 것이다. 기대 여명이 50년이면 5표, 10년이면 1표를 갖자는 취지였다. “(아들 말은) 왜 미래 짧은 분들이 똑같이 표결을 하냐는 거다”, “되게 합리적” 같은 첨언도 눈길을 끌었다.
민주당의 양이원영 의원이 “맞는 이야기”라고 거든 것도 화를 키웠다. 양이 의원은 “어떤 정치인에게 투표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은 그 미래에 살아 있지도 않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과 친명(친이재명계)은 어쨌거나 일단락을 기대할 것이다. 김은경 혁신위가 오늘 대의원제 혁신안을 발표한다는 계획이 나온 것만 봐도 급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박자 늦은 사과로 깔끔한 수습이 된 것인지 의문이다. 혁신위의 쾌속 주행은 더더욱 어렵다고 본다. 왜? 적어도 3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분별력이다. 민주당은 뒷방에 감추고 싶은 해묵은 전력이 있다. ‘노인 폄하’ 전력이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60대 이상은 투표 안 해도 괜찮다.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했던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해 심각한 해당 행위를 한 ‘명망가’가 수두룩하다. 김은경 혁신위는 옛 허물을 잘 덮어야 했다. 결과는 정반대다. 소방수를 불렀더니 방화범이 온 격이다. 언행을 가리는 분별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허물이 이리 큰데도 당내 쟁점을 놓고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첫 칼질부터 반발만 부를 공산이 크다.
두 번째,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도 크다. 조선 유학자 송시열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가르침을 화두로 삼았다. 고대 아테네 철학자 솔론도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여기엔 맥락이 있다. 조카 노래에 반해 ‘어찌 음정을 잡느냐’며 배움을 청하다 반응이 삐딱하자 황망히 답한 것이다. 앞서 솔론 조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고 한다. “그래서 뭐 하게요? 노래 부를 날이 많이 남지 않으셨잖아요”라고. 이번 발언은 솔론 조카를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다. 조카의 면박 또한 “되게 합리적”으로 비치지 않을지 궁금할 정도다.
세 번째, 헌법적 권리에 대한 결례도 빼놓을 수 없다. 참정권은 불가양(不可讓)·불가침 권리다. 미국에서 여성 투표권이 인정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수잔 앤서니라는 활동가가 있다. 1872년 미국 대선에 참여한 죄목으로 체포돼 법정 투쟁을 했다. 당시 변호인 헨리 셀든은 “참정권을 빼앗긴 사람은 본질적으로 노예”라는 열변을 토했다. 김 위원장은 어찌 보는지 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셀든 주장을 부정할 수 없다면 ‘미래 짧은’ 운운은 대체 뭔 논리인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필요도 있다.
물론 김 위원장에게 급한 것은 달리 있을 것이다. 노인회 방문 때 “시댁 어른들도 남편 사후에 제가 18년을 모셨다”고 한 말에 대해 미국 사는 시누이가 장문의 글을 써서 “새빨간 거짓말”이라 했으니 그 수습만 해도 보통 급한 게 아니다. 김은경 파문은 공적 영역에서든, 사적 영역에서든 실로 역동적이다. 김은경 혁신위를 주목하는 많은 사람이 할 말을 잃게 되기 쉽다. 이러다 볼테르가 예견한 막다른 길로 다들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trala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