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수준 요구 사실상 불가능
관련 판례는 6건…대처법 없어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경제 6개 단체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촉구했다. 경제6단체는 18일 입장문을 통해 노동조합법 제2조?제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반대와 함께 중대재해처벌법 신속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50인 미만 사업장이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법 적용 시기를 2년 더 유예해야 하고, 경영자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을 합리적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준비를 벅차하는 상태다. 원료재생업을 하는 C 대표는 “준비가 전혀 안 됐다. 2년 유예가 주어지면 물론 노력은 하겠지만, 한계가 있다”며 “대기업과 같은 잣대로 보면 인력과 자본 면에서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법 취지 공감하지만…자본·인력 현실 어려워=C 대표는 “비용도 문제지만 안전 관련 직원 채용도 어렵다”며 “작업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여기 오지 않으려 하고,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에 나이 든 사람까지 쓰는 상황인데 전문 인력을 채용한다고 해서 우리 공장에 근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안전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업종으로 보면 중대재해라고 불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 항상 신경 쓰고 있다”면서도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요구하는 수준을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 대표는 “대표들은 공장이 돌아가면 24시간 불안하다”며 “혹시나 ‘화재, 인명사고가 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 속에 살고 있고, 회의하면 항상 안전에 관해 얘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사고라는 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춥고, 덥고 하면 아무리 안전 교육을 해도 직원들의 주의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지는데, 그럴 때 꼭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이어 “운전만 하더라도 내가 주의해도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완벽한 준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대표가 구속될 수 있다는 건 큰 부담”이라고 토로했다.
C 대표는 “구속되고 나면 이 회사는 의사결정 못 한다”고 짚었다. 그는 “사실 중소기업에서 대표들의 가장 큰 역할은 영업”이라며 “영업사원들이 있지만, 규모가 작다 보니 대표가 와서 한마디 하지 않으면 의사결정이 안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회사 경영 전반이 마비되면 근로자의 생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C 대표는 “근로자는 17명 정도지만 가족까지 치면 한 30~40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명 내외 건설업종 회사를 운영하는 D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언론도 그렇고 크게 생각을 하면서 자꾸 대표가 구속되는 등의 부분이 부각되다 보니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대처하는 것이 너무 광범위하고 막연한 부분들이 있다”고 하소연했다.
중대재해 발생 가능성이 적은 업종에서는 적극적으로 준비에 나서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E 대표는 “건설 현장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데는 아니니까 저희는 크게 적용되는 사항이 많지는 않다”며 “관련된 내용은 들어보고 있지만, 준비는 거의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 위반 판결 보니…위반 전력·법령 미숙지 불리해=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온유파트너스, 한국제강, 시너지건설, 만덕건설, 건륭건설 등 6건의 사건에 대한 판결이 선고됐다. 모두 경영 책임자의 유죄가 인정됐고, 실형을 선고받은 대표이사도 나왔다.
온유파트너스 사건은 4월 6일 1심 판결이 나오면서 국내 첫 선고 사건이 됐다. 법원은 온유파트너스 대표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는 등 관련자와 법인의 유죄를 인정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를 받은 원청 대표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처벌된 원청·하청업체 소속 현장책임자보다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다만 이 회사는 법에서 정한 의무를 거의 이행하지 않아 안전보건 확보의 구체적인 이행 여부, 의무 불이행과 중대재해 간 인과관계 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살펴보기는 어려웠다.
두 번째 선고 사건인 한국제강 사건에서는 대표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대표이사가 처음으로 법정구속 됐다. 8월 23일 항소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간 상태다.
이번 사건은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반복되면 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남겼다. 특히 항소심은 한국제강의 대표이사가 의무 이행에 대한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점도 양형요소로 지적했다. “몰랐다”는 것이 더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셈이다.
또 재판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직후로 회사에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입법이 이뤄진 후 시행에 유예기간을 둔 상태”라며 회사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년 1월 50인 미만 기업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확대된 뒤 사고가 발생해 재판에 넘겨질 경우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호소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너지건설 대표는 6월 23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안전·보건에 관한 목표와 경영방침 설정, 유해·위험요인 확인·개선, 관련 예산 편성 등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점이 모두 인정됐다.
8월 25일 선고된 만덕건설 사건에서는 다소 구체적인 판단이 나왔다. 재판부는 “업계에서 통용되는 표준적인 양식을 별다른 수정 없이 활용하는 데 그치거나 안전·보건을 확보하기 위해 실질적·구체적 방안이 포함되지 않으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요구하는 목표와 경영방침을 설정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표이사의 안전보건 확보의무 위반과 중대산업재해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도 인정했다.
재해 예방 관련 예산은 산업안전보건관리비 뿐 아니라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갖춰야 할 인력, 시설, 장비 구비를 위한 비용이 모두 포함돼야 한다고 봤다. 예산이 편성돼 있더라도 사업장에서 용도에 맞게 집행되지 않으면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회사가 컨설팅 업체에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의뢰하고도 관련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아 체계 구축이 지지부진하던 중 중대재해가 발생한 점을 법률 위반 고의 인정의 근거로 삼았다.
재판부는 “이를 종합하면 대표이사는 안전보건관리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채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방치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중대산업재해 발생에 관한 예견 가능성도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이 상시근로자 수가 적다는 이유로 의무 이행 수준을 완화해 판단하거나, 양형에 소규모 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도 있다. 소규모 기업도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절히 이행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건륭건설 대표이사는 6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자문을 받아 안전보건 경영시스템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사업 특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통상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았다. 위험성 평가도 명목상으로만 실시해 실질적인 위험성 개선 절차가 없었다고 봤다. 상시근로자는 50명 미만이지만, 양형 등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2일에는 아파트 관리 하청업체 대표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 사건은 검찰이 처음으로 공동주택(아파트) 관리 업체에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