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우리말] 시간의 팽창 '슬로 모션' → '느린 화면'

입력 2023-11-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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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보리' 스틸컷 (네이버영화)
▲영화 '나는 보리' 스틸컷 (네이버영화)

이탈리아의 영화평론가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명명했다. 영화에는 공간예술(건축, 조각, 회화)과 시간예술(문학, 음악, 무용)의 특성이 모두 녹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간예술'로서의 영화에 관해 살펴보자. 영화는 자유자재로 과거(flash-back)와 미래의 시점(flash-forward)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혹은 빠르게) 포착할 수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포착하는 것. 바로 슬로 모션(slow motion)이다. 슬로 모션은 화면에서의 움직임이 실제보다 느리게 보이도록 하는 기법이다. 고속으로 촬영해 정상 속도로 영사한 느린 동작의 화면이 바로 슬로 모션이다.

국립국어원은 슬로 모션을 '느린 화면'으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권장한다. 느린 화면의 미학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대화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느린 화면 안에서 주인공의 시간은 확대하고 팽창한다. 가령 다른 인물에게 부여되는 1초의 시간성이 느린 화면 안에서의 주인공에게는 1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논문 '비디오아트의 미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의 저자 한의정의 논의처럼, 느려진 동작 속에서 인물의 감정은 훨씬 더 증폭돼 전달된다. 이 같은 지각경험은 관객을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시공간이 아닌, 확장된 시공간으로 인도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영화 '나는 보리'의 주인공 보리(김아송)는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 살 소녀다. 청각장애인인 아빠와 엄마, 남동생 사이에서 보리는 늘 외로워한다. 영화는 청각장애인이 되고 싶어 하는 보리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 보리는 엄마와 남동생이 정답게 노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보리의 얼굴을 느린 화면으로 포착한다. 엄마와 남동생의 시간에 비해 느리게 흐르는 보리의 시간 속에서 관객은 소녀의 증폭된 외로움을 목도한다.

▲영화 '중경삼림' 스틸컷 (네이버영화)
▲영화 '중경삼림' 스틸컷 (네이버영화)

영화 '중경삼림'은 느린 화면과 빠른 화면(fast motion)의 중첩을 통해 관객에게 기이한 지각경험을 선사한다. 콜라를 마시고 있는 양조위와 그를 무심히 바라보는 왕페이의 시간은 느리게, 두 사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빠르게 표현함으로써 청춘의 고독과 방황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서 관객은 시간 역시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사람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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