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돈을 공용화폐로?”…아르헨티나 ‘괴짜 대통령’ 공약, 가능할까? [이슈크래커]

입력 2023-11-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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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마일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9일(현지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비에르 마일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9일(현지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대통령 선거로 격변이 예고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아르헨티나입니다.

아르헨티나 내무부 중앙선거관리국(DINE)에 따르면 하비에르 밀레이(53·자유전진당) 후보는 19일(현지시간) 대선 결선 투표에서 개표율 99.28% 기준 55.69% 득표율로, 44.30%의 표를 얻은 집권당의 세르히오 마사(51)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승리했습니다.

앞서 지난달 본선 투표에선 29.99%의 득표율로 마사(36.78%)에게 밀렸지만, 1. 2위 후보 맞대결로 치러진 이날 결선에서 역전한 겁니다.

사실 밀레이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 없던 극우 계열의 ‘아웃사이더’ 하원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8월 예비선거에서 중도우파 연합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치안장관을 누르고 깜짝 1위를 차지하며 관심을 끌기 시작했죠.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를 표방한 밀레이는 이후론 줄곧 여론조사 1위를 달렸고, 본선 투표에선 2위로 잠깐 주춤했으나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외신들은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이 좌파 정부의 실정을 심판했다고 평가했죠.

다만 밀레이가 내건 공약에 대해선 상반된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중앙은행 폐쇄, 아르헨티나 공식 화폐 폐기 등 파격적인(?) 경제 정책이 아르헨티나는 물론, 국제 금융 시장에 적잖은 파동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요. 밀레이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인플레이션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다른 나라 화폐를 쓰겠다는 공약, 정말 실현될 수 있는 걸까요?

▲10월 1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에서 사람들이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10월 1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에서 사람들이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밀레이 ‘과격 공약’ 배경은…아르헨티나 심각한 경제난

아르헨티나는 한때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부국이었습니다. 무려 1913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지하철이 개통될 정도로 최첨단 선진국이었죠. 이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인들이 앞다퉈 이민을 결정했고, 아르헨티나는 풍부한 노동력을 얻으면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지난 40년간 9번의 국가 부도를 경험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도 22차례나 받았는데요. 2013년엔 25%대의 인플레이션을 10.8%로 축소해 고의로 대외 채무를 줄여, IMF는 아르헨티나를 ‘경제지표조작국’으로 규정하고 자금 지원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016년에야 IMF의 불신임 조치에서 벗어났죠.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빈곤율은 40%가 넘었고, 특히 연간 물가상승률은 130~140%대인데요.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가 종이와 같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를 향한 비판 여론은 높아져만 갔습니다. 실제로 이번 밀레이 당선에는 좌파 포퓰리즘인 페론주의에 대한 회의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는데요. 페론주의자들은 군부 독재 기간(1976~1983년)을 제외하고 대부분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권도 페론주의의 한 분파죠.

그간 아르헨티나 정부는 현금성 복지 정책을 남발해왔습니다. 코로나19 시기엔 노동자들에게 ‘인당 1만 페소 지급’ 같은 현금 보조금을 뿌렸죠. 이외엔 기업 국유화, 공공의료·대중교통 등 공공지출 확대, 통제적 환율 정책 등이 꾸준히 시행됐습니다. 모두 페소를 ‘마구’ 찍어내면서요.

현지 매체에 따르면 현 정권 4년 만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본원 통화량은 2019년 1조7200억 페소(약 6조5000억 원)에서 올해 6월 6조200억 페소(22조7000억 원)로 3.5배 폭증했습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현금을 많이 푼 거죠.

밀레이가 노린 것도 이 부분입니다. 그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전기톱을 들고 “기존 정치를 쓸어버리겠다”며 경제난을 부추긴 페론주의 좌파는 물론, 우파 야당 연합까지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장기 매매나 총기 소지 허용 등 파격 공약을 제시하면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별명도 얻었는데요. 기존 정권에 반감이 높을 대로 높았던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의 표심은 그를 향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밀레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많은 아르헨티나인은 변화에 대한 절박함을 느꼈다”고 분석했죠.

▲9월 12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에서 열린 집회에서 하비에르 마일리 자유선진연합 후보가 자신의 얼굴 사진이 새겨진 100달러 지폐 현수막을 들고 있다. 마일리 후보는 페소화의 달러 대체와 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했다. (AP/연합뉴스)
▲9월 12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에서 열린 집회에서 하비에르 마일리 자유선진연합 후보가 자신의 얼굴 사진이 새겨진 100달러 지폐 현수막을 들고 있다. 마일리 후보는 페소화의 달러 대체와 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했다. (AP/연합뉴스)
“페소는 쓰레기, 달러 쓸 것”…걸림돌 없을까

밀레이의 공약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이 모이는 건 ‘페소 폐기’입니다. 밀레이는 인플레이션의 핵심을 고평가된 페소로 꼽으면서 중앙은행의 발권 기능을 폐기하고, 미 달러를 공식 통화로 채택하겠다고 했습니다.

달러를 공용 화폐로 쓰는 나라가 없는 건 아닙니다. 현재 엘살바도르, 파나마, 에콰도르 등이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말리아, 짐바브웨 등은 자국 화폐와 달러를 병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르헨티나가 페소 대신 달러를 쓰겠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죠.

그러나 문제는 아르헨티나가 이들 국가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아르헨티나처럼 경제 규모가 큰 나라가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한 경우는 없습니다.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면 자국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가 페소를 대체할 만큼의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현실적인 걸림돌이죠. 아르헨티나는 IMF에 430억 달러 규모의 빚을 지고 있고, 당장 내년 220억 달러 규모의 채무 상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외환 보유액도 100억 달러 이상의 적자 상태입니다.

국회라는 벽도 굳건합니다. 당장 밀레이가 속한 자유전진당은 하원 257석 중 37석, 상원에선 72석 중 7석만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하는 데엔 상당한 난항이 예상되고, 정책이 대법원에서 막힐 수도 있죠. 앞서 호라시오 로사티 대법원장은 9월 페소를 외화로 대체하는 것은 위헌이며,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달러를 공용 화폐로 채택하는 게 공공재정 악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에콰도르 역시 2000년 달러를 공용 화폐로 채택했지만, 물가 상승을 잡은 대신 2020년 재정난이 악화돼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엘살바도르도 미국이 경제 위기 때 달러를 풀 때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죠.

정권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반감도 극복해야 합니다. 빈곤율과 물가상승률을 끌어올린 페론주의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이에 대응한 우파 정치인들의 역량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2015년 취임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은 친기업 성향의 중도 우파 출신으로, “포퓰리즘에서 아르헨티나를 해방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며 당선된 바 있습니다. 그는 정책 전기·가스, 공과금 인상, 생필품 가격 동결 등 민심을 잡는 데 공을 들였으나, 4년 만에 다시 페론주의 정권에 자리를 내줘야 했죠. 중앙은행이 물가를 붙잡기 위해 열흘 만에 정책 금리를 3차례 인상하고, 금리를 40%까지 끌어올려도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페론주의 정권의 문제가 대규모 국채 발행에 따른 정부 부채 확대에서 비롯됐다면, 마크리 정권의 문제는 외채 확대에 있었습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경제학자는 아르헨티나가 외채 규모를 키우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이자 지급 부담도 문제”라고 짚었습니다.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마일리 후보의 소감을 지지자들이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마일리 후보의 소감을 지지자들이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대선 후 페소 가치 급락…아르헨티나의 미래는?

밀레이가 당선된 후 첫 거래일 암시장에선 달러 대비 페소 가치가 10% 이상 급락했습니다.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문을 연 아르헨티나 외환 암시장에선 페소 가치가 전장 대비 12% 낮은 달러당 1045페소를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아르헨티나 당국의 자본 통제 속 페소/달러 공식 환율은 356페소 수준인데, 암시장에서 페소 가치가 66% 가깝게 평가절하된 겁니다.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들은 향후 6주간 페소 가치가 80%가량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달러 채택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회복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월가 베테랑 투자자인 마크 모비우스는 “아르헨티나의 달러화 전환 가능성은 경제적 이익이 될 것”이라며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내다봤죠.

다만, 급진적인 추진은 인플레이션 이상의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무려 3000% 이상의 인플레이션을 겪은 바 있는데요. 이에 정교한 정책 구상과 은행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는 초기 자금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대출을 위한 외환보유액부터 바닥난 처지라 여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죠.

자신이 내걸었던 공약과 관련해 많은 걸림돌이 있는 상황, 밀레이는 그가 장담한 대로 이전 정권의 무능을 척결하고 아르헨티나를 다시 띄울 수 있을까요? 다음 달 10일 출범하는 ‘괴짜’ 정부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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