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법저법] 내가 쓴 시나리오에 내 이름이 없다?

입력 2023-12-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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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현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법조 기자들이 모여 우리 생활의 법률 상식을 친절하게 알려드립니다. 가사, 부동산, 소액 민사 등 분야에서 생활경제 중심으로 소소하지만 막상 맞닥트리면 당황할 수 있는 사건들, 이런 내용으로도 상담받을 수 있을까 싶은 다소 엉뚱한 주제도 기존 판례와 법리를 비교·분석하면서 재미있게 풀어드립니다.

저는 최근 개봉한 유명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입니다. 그런데 정작 엔딩크레딧 ‘각본’ 란에는 제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집필 노고를 전면으로 부정당한 것 같아 억울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의 뼈대를 구축하는 각본을 집필하는 필수 인력입니다. 하지만 촬영 ‘현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화계 특성상 작가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되는 사례도 생기곤 하는데요. 소재현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와 함께 자세한 내용을 짚어 봤습니다.

(이미지투데이)
(이미지투데이)

Q. 제 아이디어로 직접 쓴 시나리오가 있어요. 제작사는 영화가 완성되면 엔딩크레딧 각본가 부분에 제 이름을 넣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연출을 맡게 된 감독이 시나리오 일부를 고쳤고, 제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새겨 개봉해버렸습니다. 극 중 설정과 주인공은 동일한데 에피소드가 달라졌다면서요. 이 경우 뒤늦게라도 제 이름을 각본가에 넣을 방법이 있을까요?

A. 대법원 판례는 저작권법상 저작권 보호 대상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적 노력에 의해 얻어진 사상 또는 감정을 말, 문자, 음, 색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현한 창작적인 표현형식”.

즉 '외부로 표현한 창작적인 표현형식'이 아닌 아이디어나 이론, 사상이나 감정 그 자체는 독창적이거나 새롭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떤 주제를 다루기 위해 시나리오에 전형적으로 수반돼야 하는 사건, 배경, 필수 장면, 추상적인 인물의 유형 등은 “아이디어”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봐 저작권법에 따른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법원은 이런 판례를 토대로 저작권 침해 여부를 보다 구체적으로 가리기 위해 두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인 유사성'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근본적인 본질이나 구조를 복제해 포괄적(비문언적)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 작품의 세부적인 부분을 복제해 두 저작물 사이에 문장 대 문장으로 대칭되는 부분적(문언적)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요. 둘 중 어느 하나가 있으면 실질적 유사성이 인정됩니다.

사례에서는 제작사가 최초 시나리오의 극 중 설정과 주인공 등 배경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차용하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변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변경된 시나리오에서 최초 시나리오의 세부적인 부분이 복제돼 두 저작물 사이에 문장 대 문장으로 대칭되는 부분적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저작권법 제123조(침해의 정지 등 청구)에 근거한 저작권침해정지청구를 통해 시나리오의 각본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부분적 유사성 없이 시나리오가 수정돼 단지 시나리오의 극 중 설정과 주인공 등 배경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만 차용된 것이라면, 앞서 살펴본 대법원 판례에서처럼 포괄적 유사성이 인정되기 어려워 시나리오 원저작자로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를 제작사에 제공하기 전에 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시나리오나 시놉시스 등을 저작권 등록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물론 저작권은 등록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이지만, 저작권을 등록할 경우에는 추후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유리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작권을 등록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디어"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작사에게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할 때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Q. 제작사가 끝없는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합니다. 이 인물 심리가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됐으면 좋겠다, 저 사건이 좀 더 흥미진진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주문이 들어와 20번 이상 원고를 고쳐주었지만, 캐스팅 고(배우 캐스팅을 위해 보내는 최종 원고)가 확정될 때까지 추가 보수 없는 노동이 계속될 것 같아 힘듭니다. 시나리오 계약서에 '몇 번까지 수정한다'는 단서를 달아놓지는 않은 상태인데, 더 이상의 수정 요청을 거부하면 계약위반이 될까요?

A.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정ㆍ배포한 ‘영화분야 시나리오 표준계약서’에서는 시나리오의 집필과 관련해 시나리오의 초고부터 3고까지 각각 구체적인 기간을 정해 작가가 제작사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사례에서는 표준계약서와 다르게 시나리오 수정 횟수에 대한 제한을 정해 놓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통상 ‘제작사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작가는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내용으로 계약이 체결되는 만큼, 사례와 같은 상태에서 수정 요청을 거부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계약의 불완전이행을 주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미 20번 이상 제작사의 요구에 의해 시나리오 수정에 응했다면 법원에서 시나리오 계약의 불완전이행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또 시나리오 계약에서 집필 기간을 구체적으로 특정했다면 그 기간이 지난 이후까지 작가가 수정에 응할 계약상 의무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제작사가 제공한 소재와 장르, 설정 등에 맞춰 글의 기틀을 잡고 120분 분량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납품했습니다. 문제는 촬영 현장에서 시나리오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낸 현장 스태프들에게도 저와 똑같은 각본가 크레딧을 달아주었다는 겁니다. 각본가로 총 8명이 등재돼 업계에서는 소위 '누더기 크레딧'이 됐다고들 합니다. 한 달 가까이 시나리오를 쓴 저와 현장에서 몇 마디 말로 의견을 더한 스태프들이 똑같이 각본가로 인정받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법적으로 대처할 방법이 있을까요?

A. 작가는 저작물에 대한 인격적ㆍ정신적 권리자입니다. 때문에 저작권법상 저작인격권에 해당하는 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 유지권을 갖게 됩니다. 작가의 크레딧은 저작인격권의 표현으로서 작가의 자긍심, 경력관리, 재산권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례처럼 작가와 협의 없이 제작사에 의한 크레딧의 자의적 해석과 표기가 이뤄지고, 작가의 크레딧이 보장받지 못하거나 침해당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분야 시나리오 표준계약서’를 배포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 계약서에는 크레딧에 대한 작가와의 협의, 크레딧 병기 원칙, 작가의 크레딧 삭제요청 등의 조항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례에서는 시나리오 계약서에 크레딧에 관한 구체적인 계약 조항을 삽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제작사에 제공한 시나리오와 영화화된 최종 시나리오 사이에 포괄적 또는 부분적 유사성을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면 작가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인격권(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 유지권)에 근거해 저작권침해정지를 청구할 수 있고, 단독으로 크레딧에 각본가로 표기될 수 있습니다.

법률 자문해 주신 분…

▲소재현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소재현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 소재현 변호사

제5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공정거래조정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2022년부터는 법무법인(유한) 바른 소속 변호사(공정거래팀)로 활동 중이다. 주로 공정거래‧금융자문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전면개정된 공정거래법 조문별 판례와 내용’(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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