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이하며

입력 2023-12-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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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이 마당에서 놀 때 서로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도 손사래를 쳐 조심시켰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 아무리 형제라도 서로 이름을 크게 부르면 그 소리를 저세상 명부의 손님이 듣고 불러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그건 미신이에요.” 하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을 들판을 둘러보고 올해는 농사가 잘되었다고 말할 때에도 그건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여길 일이지 밖으로 자랑하듯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직 추수 전인데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면 들판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우리는 할머니는 할머니의 이름조차 쓰실 줄 모르는 분이어서 저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해가 오고 가는 세밑에는 조심시키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하늘에 대한 조심뿐이 아닙니다. 학교를 오가며 얼음길 눈길을 걸을 때 아무리 추워도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라고 하셨고, 꼭 장갑을 끼게 하였습니다. 장갑을 끼고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외출하실 때에도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또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손자들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들어가고, 또 학교에서 작은 상이라도 받아오면 밖으로 내색 없이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혼자 그걸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돌아보면 한 해가 가고 올 때, 특히나 해가 바뀐 다음엔 꼭 안택 고사를 지냈습니다. 고사를 지낼 때는 먼저 좋은 날을 받아오고, 사흘간 대문과 쪽문에 금줄을 치고 금줄 아래에 황토를 깔아서 집 안으로 부정이 들지 않도록 합니다. 할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외출을 삼갑니다. 제물로 정성스레 떡과 술을 준비합니다. 떡은 켜켜이 팥을 넣은 시루떡과 흰 쌀가루로만 만든 백설기를 함께 준비합니다.

치성드리고 모시는 신도 많습니다. 집안에 있는 성주신과 조왕신, 터주신, 삼신 모두에게 떡과 술을 바치고 또 한 해의 안녕을 빌고 축원합니다.

이제는 이런 안택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어머니가 오랫동안 할머니의 뒤를 이어 우리가 다 성장할 때까지 해마다 안택 고사를 지냈습니다. 고사를 지낼 때마다 어머니는 이 집이 해마다 안녕하고, 자식들 역시 어디 다치거나 앓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 다 할머니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뒤란에 있는 장독대에 정화수도 자주 놓여 있었습니다. 정화수는 남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길러온 우물물입니다. 부엌을 지켜주는 조왕신 몫으로 부뚜막에도 커다른 놋쇠 양푼 가득 정화수를 담아 올립니다. 가족 중 누군가 출타했을 때 안녕을 빕니다. 우리 여러 형제가 차례로 군에 가 있을 때 뒤란 장독대에 자주 정화수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나를 위한 정화수를 내가 본 적이 없지만, 집을 떠나 있는 형제를 위한 정화수가 장독대 위와 부뚜막에 늘 올려져 있는 걸 우리 형제들은 서로 보았습니다. 물이지만, 그냥 물이 아닌, 물의 엄숙함과 비원이 그 안에 깃들어져 있습니다.

우리 어린 날 할머니가 그러실 때는 미신처럼 여겼고, 좀 더 자라 어머니가 그러실 때는 아무 근거도 효험도 없는 정성으로 여겼고, 우리가 다 자란 다음에야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무탈하게 자라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가 지나갑니다. 내일 모레 글피면 새해를 맞이하게 되지요.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모아 두 분께 마음의 정화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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