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술자료 요구’ 2배로…中企 보호막 어디 있나

입력 2024-01-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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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업자가 하도급업체(수급사업자)에 기술 자료를 요구하는 사례가 증가했다고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2023년 하도급 거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하도급업체에 기술 자료를 요구한 적 있는 원사업자 비중은 7.2%로 1년 전(3.3%)보다 2배 이상 늘었다. 공정위는 제조·용역·건설업 1만3500개 원사업자와 9만 개 수급사업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중복 사례도 많겠지만 단순화하면 지난 한 해에 6480개 수급사업자가 생명줄 같은 기술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더 거슬리는 통계도 있다. 원사업자 가운데 7.6%는 기술 자료를 구두로 요청했다. ‘관행적 요구’(50.4%)를 이유로 든 응답이 절반을 차지했다. 위법행위다. 하도급법은 기술 자료를 요구할 때 목적과 권리귀속 관계, 대가 등을 서면으로 적어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비밀유지 계약도 해야 한다. 중소기업 기술을 유용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절차적 장치다. 원사업자 상당수가 이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하도급 계약은 갑을관계가 명확하다. 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요청을 하기도 여간 어렵지 않다. 하도급 대금 연동제 이행 실태와 관련된 설문결과를 눈여겨볼 일이다. 하도급 대금 조정 신청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수급사업자는 8.6%에 그쳤다. ‘공급원가 상승 폭이 크지 않아서’(17.0%)라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고물가, 고금리 등 모두가 원가 상승 압력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다. 업계 내부의 갑을관계가 상식에 반하는 답변으로 나타났을 개연성이 크다.

중소기업 기술 보호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다. 공정위는 지난해 초 ‘기술자료요구서 및 비밀유지계약서 작성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배포했다. 기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사례·실무 중심으로 알기 쉽게 만들었다고 홍보했다. 씁쓸하다. 서면발급 사항 여부가 불분명해 하도급 업체의 기술 자료를 서면 요청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두 번째로 많은 이번 조사 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되지 않나.

중소기업은 기술 유출에 취약하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2020~2023년 중소기업 300곳 중 10.7%가 기술 탈취 피해 경험이 있다고 했다. 피해 업체 중 43.8%는 별도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란 응답이 78.6%에 달했다. 지난해 대·중소기업 간 특허 심판 심결 16건 가운데 중소기업 패소율이 56%에 달한다는 특허청의 분석 결과도 있다.

기술자료 요구에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기술 탈취가 될 수 있다. 정부가 갑을관계에 뿌리를 둔 기술 탈취 가능성에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일부 악질적 행태는 더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엄중한 대응이 필요하다. 중소기업 특화기술을 대하는 원사업자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다. 미국, 영국 등에서 일찍부터 도입한 디스커버리 제도(증거개시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할 필요도 있다. 특허 침해 입증 증거만 쉽게 찾을 수 있어도 중소기업 기술 보호 효과는 지금보다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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